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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캐시어스 클레이와 무하마드 알리

 

캐시어스 클레이는 미국의 복서였다. 흑인가의 가난한 소년이었던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 라이트 헤비급 미국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미국의 영웅이 된 줄 알았다. 그러나 햄버거를 사려고 들어간 가게의 백인에게 그는 여전히 흑인일 뿐이었다.

 

“검둥이에게 팔 햄버거는 없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았고, 금메달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는 흑인을 멸시하는 백인들의 미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싸우는 프로선수가 되기로 했다.

 

아마추어 전적 100승 5패를 기록한 그는 프로로 전향했다. 프로권투에서도 그의 주먹은 막강했다. 그는 약관 21세에 소니 리스턴을 7회 TKO로 물리치고 WBA와 WBC 헤비급 세계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

 

당대 최고의 복서인 챔피언 소니 리스턴에게 도전했을 때 모든 전문가가 캐시어스 클레이의 패배를 예언했다. 소니 리스턴에게 도전하는 그를 한 마리 파리에 불과하다고 경멸도 서슴지 않았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경기 전에 이렇게 응수했다.

 

‘한 마리의 파리가 쇠 쟁기를 끌 수 있다고 / 그대에게 말하는 나는 좋은 사람 /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나에게 묻지 말고 / 파리에게 쟁기를 매라.’

 

한 편의 시였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그의 시처럼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소니 리스턴을 제압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써온 자신의 이름을 버렸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노예주가 자신의 조상에게 붙여준 성을 따라 붙인 이름이었다. 그가 지은 새 이름이 우리가 기억하는 ‘무하마드 알리’다.

 

1965년 열린 소니 리스턴과의 2차전에 그는 ‘캐시어스 클레이’가 아닌 ‘무하마드 알리’로 링에 올랐고, 이겼다. 무하마드 알리의 주먹을 이길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1967년 무하마드 알리는 링 밖에서 챔피언 벨트를 빼앗겼다.

 

훗날 세계가 ‘20세기의 가장 더러운 전쟁’으로 부른 베트남 전쟁 참전을 거부한 무하마드 알리는 타이틀과 함께 선수자격까지 박탈당했다.

 

무하마드 알리는 물었다.

“베트콩들은 나를 흑인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내가 왜 나를 흑인이라고 욕하는 백인을 위해 나를 욕한 적이 없는 베트콩을 죽여야 하는가?”

 

그는 베트남 전쟁 징집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향 루이빌에서 열린 흑인들의 시위에 참여했다. 공정한 주택정책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한 무하마드 알리의 연설은 20세기가 남긴 최고의 연설로 남았다.

 

‘내 고향 루이빌에서는 이른바 우리 ‘니그로’가 개 취급을 받고 기본적인 인권도 누리지 못하는데 왜 그들은 나에게 군복을 입고 1만 마일 떨어진 베트남에 가서 거기에 사는 황색 인종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고 총을 쏘라고 요구하는가? 사람들은 참전 거부 때문에 내가 수백만 달러를 손해 보게 될 거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말했고 이제 다시 말할 것이다. 내 동족의 진정한 적은 바로 이 나라 안에 있다. 나를 감옥에 가두어 넣는다면 뭐 어떤가? 우리는 이미 지난 40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무하마드 알 리가 자신의 금메달을 강물에 집어던진 지 70년이 지났다. 세계는 그때보다 얼마나 공정하고 정의로워 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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