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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29. 남한산성 ‘守禦將臺’(수어장대) 힘찬 글씨체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동서남북에 설치된 장대(將臺) 중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그 중 군사통솔에 가장 유리한 곳이어서 ’수어장대’라고 이름했다. 장대는 원래 성의 가운데에 하나 더 있어야 하지만 남한산성의 지형상 가장 높은 위치인 서장대가 군사 작전의 중심기능을 맡게 된 것이다. 1779년 정조 임금이 이곳에 와서 군사훈련을 참관하면서 이런 사실을 대화로 남겼다.
 

 


수어장대는 처음에는 단층 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라 부르던 것을 영조 27(1751)년에 유수 이기진이 2층 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 바깥쪽에는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수어서대(守禦西臺)라고도 불렀다. 무망루는 인조가 겪은 시련과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하려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못하고 세상을 뜬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힘있게 쓰여진 수어장대 현판 글씨는 누가 쓴 것일까?

 


글씨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직접 언급한 문헌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현판에 새겨진 낙관을 살펴보니, ‘세병신계하하한(歲丙申季夏下澣)’이라 썼고, 전서체로 ‘집금오대장군(執金吾大將軍)’이라는 직함을 양각한 주문(朱文)과 ‘‘반남박주수군여지인(潘南朴周壽君與之印)’이라 음각한 백문(白文)을 새겼다. 즉 이 현판은 丙申(1836)년 6월 하순에 집금오대장군 박주수(朴周壽)가 썼다는 것이다. ‘집금오대장군’은 곧 의금부도사이다. 그런데 현판 글씨를 쓴 것이 1836년 6월 하순이고, 세상을 뜬 것이 7월 5일이므로 이 글씨는 세상을 뜨기 수일 전, 생애 마지막 유묵이 된 것이다.

박주수는 정조 11(1787)년에 태어나 헌종 2년(1836)에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군여(君與),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할아버지는 판돈녕부사 박준원(朴準源)이고, 아버지는 호조 판서 박종보(朴宗輔)이며, 어머니는 달성 서씨, 광수(廣修)의 딸이다. 고모가 순조(純祖) 임금을 낳은 ‘수빈(綏嬪)’ 박씨이다.

 


순조 7(1807)년 문과에 급제한 후로 세자시강원 사서를 지내고, 승지가 돼 왕을 측근에서 보필했다. 이어 성균관 대사성을 연임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성부 판윤을 세 차례나 역임했고, 선혜청 당상·대호군·훈련대장·화성유수·총융사·병조와 형조, 예조판서·좌참찬 등을 지내는 등 왕대비의 총애가 두터웠다.
 
병조판서로 있던 순조 33(1833)년 3월 농수산물의 중간 도매상인 경강상인(京江商人)들이 한강으로 실려 오는 강상미(江商米)를 매점매석 하고 팔지 않아 쌀값이 폭등했다. 그러자 많은 서울 사람들이 불만을 갖게 돼 가게를 때려 부수고 불을 지르는 등 큰 소동이 벌어졌다. 이때 피해를 입지 않은 곡물전이 없었을 정도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군대를 풀어 폭동을 진압했는데 박주수는 병조판서로서 7명을 저자거리에서 목매달아 죽이고, 11명을 먼 변방의 군대에 편입시키는 형벌을 주는 한편, 죄가 가벼운 27명은 곤장을 치고 풀어줬다.
 
수어장대의 전망은 시야가 넓게 트여서 시원한데, 숙종의 장인 김만기(金萬基)는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하고 또,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라고 하며 호란의 참상을 전해주면서 후손들에게 일침을 가해 경계했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