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3 (월)

  • 맑음동두천 21.8℃
  • 맑음강릉 23.0℃
  • 맑음서울 22.2℃
  • 맑음대전 23.7℃
  • 맑음대구 25.5℃
  • 맑음울산 18.7℃
  • 맑음광주 22.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20.2℃
  • 맑음제주 20.7℃
  • 맑음강화 17.0℃
  • 맑음보은 22.6℃
  • 맑음금산 22.2℃
  • 맑음강진군 23.4℃
  • 맑음경주시 20.5℃
  • 맑음거제 19.3℃
기상청 제공

인천 섬을 가다 55 -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 두무진 이야기

 백령도의 북서쪽 끝, 인당수 저편 장산곶과 불과 12㎞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평화로움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백령도의 오지 중 오지, 두무진(頭武津). 행정구역상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 연화3리이며 현재 76세대 105명이 거주하고 있다.

 

입동이 달포 지나 망골재에 오르는 고갯길, 탁월풍에 정면으로 맞서는 차량도 문 틈새 바람 소리에 쉬어야 한다는 신호음을 보내온다. 쇠(세)상이골재도 잿마루에 올라서면 길가의 초목은 낙엽되어 20여m 절개지가 철망에 갇힌 채 생살을 드러내 과거 진촌으로 향했던 고갯길이 고봉준령(高峰峻嶺)이었음을 실감나게 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던데, 깊은 골짜기 속에 형성된 두무진은 어떤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을까?

 

▶지명 유래

 

‘백령진지’(1802)에 의하면 “본 섬 두모진(頭毛津)은 해로의 지름길이요…(후략)…”라고 기록돼 있어 현재 사용하는 두무진 이전에 두모진으로 불렸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두모’란 뾰족한 괴암들이 머리카락 같이 솟아났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생각되지만, 한편 백령도 지형이 어떤 동물 형상으로도 볼 수 있어 서쪽(두무진)이 머리 부분 같고 동쪽의 용기원산을 꼬리로 보아 이렇게 불려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두무진은 많은 기암괴석의 모양이 모자를 쓰고 있는 무사(武士)와 같다 하여 지어진 명칭으로 장군이나 무사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유배지’가 ‘명승지’ 된 두무진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합천 출신 의병장이었던 이대기(李大期)가 당시 부패한 관리와 선조의 리더십을 비판하면서 귀양왔던 유배지가 백령도였다. 그는 4년(1620~1623)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 ‘백령도지’를 썼고, 그 중 두무진을 둘러보면서 30~40m의 돌기둥과 해식동굴 등 자연이 빚어낸 다양한 현상의 기암괴석과 자연경관을 보고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 극찬했다.

 

400년이 흐른 현재는 희소성이 높고 심미적 경관과 학술적 가치가 인정돼 1997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8호)으로 지정됐으니 유배지가 명승지가 된 것이다.

 

두무진은 수억 년 동안 파도에 의해서 이뤄진 수직의 해안 절벽과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솟아 있어 동해의 금강산 만물상과 비슷해 일명 ‘해금강’이라 불리고 있다.

 

조밀하게 살펴보면 수평으로 켜켜이 퇴적된 층리와 수직으로 틈이 간 절리현상이 선명한 규암의 돌기둥, 파도에 맞춰 자갈돌 구르는 울림소리에 물결무늬(漣痕)를 확인하니 두무진층이 백령도층의 최상층임을 알 수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원생대 상원계(약 10억 년)에 해당한다. 계단을 오르는 한 걸음마다 수백 만 년에 이를 것이라는 생각은 헛된 것일까?

▶어촌의 생존과 위험, 반공희생자합동위령비(反共犧牲者合同慰靈碑)

 

두무진 일대는 옛날 망골재와 쇠상이골재를 넘어 계곡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갯벌을 이뤘으며, 인가는 갯골 안 산기슭에 있었으나 후에 해안 제방을 막고 지형정리를 하면서 해안 가까이 집을 짓고 살았다. 백령도가 ‘먹고 남는 섬’이라지만 농토가 없은 산간벽지의 포구이자 순수하게 어업을 전업으로 하는 전형적 어촌이었다.

 

백령도에서 싱싱한 회(膾)를 먹을 수 있었던 곳, 따라서 1980년대부터 선대, 대성횟집을 비롯해 점차 가게가 많아지게 됐다. 최근에는 마을 경관 개선사업(2014~18)을 목적으로 주변 경관 개선 및 무허가 건축물 정비를 통해 살기 좋은 섬마을을 조성하고자 노력해 모두 17개 상가가 마련됐으나 현재 운영 횟집은 13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어로활동은 위치상 NLL 등 지정학적으로 위험이 따랐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70년 있었던 북한의 어선 납치 사건으로 관련 내용은 해안가 반공희생자합동위령비에 잘 나타나 있다.

 

사건 발발 반세기가 흘렀지만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어 비석 전문을 게재한다.

 

‘反共犧牲者合同慰靈碑. (하단부) 1970년 7월 9일 23시경 군사분계선 남쪽 4마일 해상에 갑자기 나타난 북한 괴뢰함정은 평화롭게 고기잡이를 하던 우리 어부들에게 발포를 가하면서 어선들을 북으로 나포해가다. 이 때 북괴에 잡혀가지 않기 위해 결사의 노력으로 뱃줄을 끊고 도망하려던 최상일은 저들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장춘빈 민경신 변호신 사명남 등 4명은 북괴로 끌려가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 항거하겠다고 귀중한 생명을 바다에 던지므로써 반공정신의 투철한 면을 보여주다.

 

이러한 사연은 9개월 간이나 강제로 북괴에 억류됐던 동료어부들이 자유대한의 품으로 귀환함으로써 알려지게 됐다. 이에 백령도 어업조합(조합장 장익보)에서는 이들의 용감한 반공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1년 두무진 분교 옆산에 반공희생자합동위령비를 건립하다.

 

반공희생자합동위령비가 설명 비문도 없이 세워졌던 것을 아타깝게 여긴 장익보옹은 사재를 희사해 안내 비문과 함께 이전토록 하다. 이 비문의 건립으로 많은 사람들이 반공투사들의 정신을 흠모하고 잠든 영혼을 위로하는 동시에 후학들이 반공정신의 귀감으로 본받게 되기를 기원하다. (1979년 12월 31일 유적재건위원회 회장 김순호)

 

본 위령비는 반공정신을 이양하고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먼저 설립했던 선배님들의 뜻을 동감한 마을 어민들이 투철한 반공정신과 협동정신의 깊은 뜻을 이곳에 심어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 어민대표로 선주들의 사비를 모아 다시 어촌계 행사로 복원 건립하게 되었음. (1987. 6. 30 어민대표 선주명단(이이산 외 13명))’

 

인당수를 유유자적하는 중국배를 대체해 비석을 복원 건립했던 두무진 선주들이 평화롭게 고기를 잡고 만선을 꿈꾸는 날을 기대해 본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삼유산연구소 이사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