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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수의 월드뮤직기행] 엘레지(Elegy)의 에릭사티 ‘그노시엔느’

영화 속의 월드뮤직 8

 

에릭 사티(Erik Satie)를 알게 된 것은 소설가 Y 씨를 통해서다. 20년 전의 이야기. 경기도 일산에 사는 문학인, 예술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날은 문화부 기자 한 명과 함께 Y 씨의 아파트에 초대받아 가서 맥주를 마셨다. Y 씨가 떨어진 안주 대신이라며 음악을 틀었다. 

 

소설가와 기자, 방송작가 셋이 문학, 예술 시사를 오가며 벌이던 격론의 힘을 빼고 술잔마저 내려놓고 귀 기울이게 하던 피아노 소리. 담담하면서 쓸쓸하고 또 기이했던.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느(Gnossienne)’라고 소개한 Y 씨가 한마디 덧붙인다.

‘김 작가가 이쪽 필(Feel)이었구만.’

그 주 주말, CD를 구입해 종일 들으면서 에릭 사티를 탐색했다.

 

프랑스 대혁명과 파리 코뮌에 이르는 약 80년의 정치적 격변 이후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으로 문화, 예술이 만개했다)에 활동했던 아방가르드 작곡가. 파리 예술가들(예를 들면, 작가 알퐁스 도데, 기 드 모파상, 에밀 졸라, 작곡가 샤를 구노, 화가 클로드 드뷔시 같은!)의 아지트였던 카페 ‘검은 고양이’에서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던 사티는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똑같은 모양의 열두 벌 검은 벨벳 슈트만 돌려 입고 수백 개 소지해 매일 들던 우산을 정작 비 오는 날에는 젖는다고(우산이!) 접고 다녔으며 흰색의 음식만 먹었고 심지어 일인 종교를 창시해 교주이자 유일 신자로 살았다.

 

사티의 악보는 또 얼마나 별났던지. 대개 안단테, 모데라토, 알레그로 등이 적혀 있을 지시어 자리에 ‘치통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난 담배가 없네......’등을 써놓았다. Y 씨 집에서 처음 들은 그노시엔느(고대 그리스인을 뜻한다), 그 유리알같이 명징한 피아노 곡 악보에도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라고 써놓았다.

 

그나마 정상(?)스러운 표현을 하나 덧붙였으니 ‘확신과 절대적 슬픔을 가지고’.

그 지시어는 영화 ‘엘레지(Elegy)’를 떠오르게 했다. 그노시엔느를 남자 주인공의 독백처럼 들리게 했던 영화.

 

2009년 개봉된 이자벨 코이젯트 감독의 이 영화는 문학평론을 하는 대학교수 데이빗(벤 킹슬리)과 서른 살 어린 제자 콘수엘라(페넬로페 크루즈)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혼 후 독신남의 자유를 마음껏 구가하며 사는 데이빗. 환갑 앞둔 그에게 다가온 콘수엘라는 성(性)적 대상이고 관계는 일회적 이벤트였다. 그것이 어린 연인에 대한 배려이고 자신에게도 늙어 추해지지 않을 예방책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콘수엘라는 그의 인생과 사랑 문법에 엇나가는 존재였다. 상처 많은 데이빗과 달리 대가족 집안에서 충분히 사랑받고 성장한 그녀는 정직하고 계산 없는 사랑을 한다.

 

노년의 자격지심은 결국 어린 연인을 떠나보냈고 뜻밖에(왜냐하면 그의 사랑은 이벤트였으므로) 극심한 상실감에 방황한다. 몇 년 후 다시 찾아온 콘수엘라는 말기 유방암 환자가 되어있었다. 데이빗은 그토록 탐했던 젊고 아름다운 가슴을 절제한 콘수엘라, 그보다 먼저 죽을 수 있는 콘수엘라 앞에서 ‘절대적 슬픔’을 느낀다.

 

데이빗이 느낀 절대적 슬픔은 사랑의 다른 말일 것이다.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느는 제자로부터 사랑을 배우는 과묵한 노교수의 감정을 세밀화처럼 전한다. 에릭 사티의 음악 외에도 아보 페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 카운터테너 필립 자루스키의 목소리로 듣는 비발디의 오페라 지우스티노(Giustino) 등도 배우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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