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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법 앞에서 불평등”, 그 “굴종의 사슬”을 끊자

 

- 정치와 법의 기만

 

“정치인들은 어떤 존재인가? 표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받고 돈은 부자들에게 받는다. 그러고는 둘 다 보호하겠다고 말하지만 정작은 누구 편인지 분명하다.”

 

미국의 진보적 정치학자 마이클 패런티(Micahel Parenti)의 경고다. 그가 쓴 『소수를 위한 민주주의(Democracy for the Few)』에서 한 말이다. 미국 정치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상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기만(deceit)과 부패(corruption) 그리고 약탈(plunder)’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20년 전, 이 주장은 정치에 대한 과도한 비판과 비관이 담겨진 것이 아닌가 했다. 하지만 자본이 지배하는 정치의 모순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되면서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고 부자들을 위한 국가 시스템이 시민의 정치기본권을 법과 제도로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법 앞에서의 평등”은 근대 민주주의의 혁명적 성과이나 현실은 ‘큰 범죄에 형벌이 아예 없거나 또는 작든지, 그리고 작은 범죄에 큰 형벌’이 내려지는 것을 경험하게 한다. 한국 사회에서 재벌은 멀쩡하면서도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출석해서 감옥에 갇히더라도 힘찬 걸음을 내딛는 모습으로 실형 기간을 채우기 전에 석방된다. 우리가 매우 흔하게 보는 광경이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는 이제 거론하기에도 식상한 ‘슬픈 상식’이 되고 말았다. 그에 더하여 권력기관에 속해 있거나 그와 인연이 깊은 특권 세력이면 법은 한없이 너그럽다. 법은 빈자(貧者)와 부자(富者)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는 미소짓고 누구에게는 호통을 치는 야누스다.

 

-약자를 희생시키는 법과 불평등의 법정

 

미국의 전설적인 대법관 휘고 블랙(Hugo Black)은 “그 사람이 지닌 돈의 규모에 따라 재판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평등의 정의는 존재할 수 없다”고 분노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법은 가혹하다. 그리고 그 가혹함을 벗어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꼼짝달싹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잘못된 판결을 뒤집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변호비용과 재판기간에 겪어야 하는 일상의 압박은 그 삶을 해체해버릴 정도다.

 

 

약자가 희생되는 구조를 법이 보장해주고 있다면 그건 정의를 파괴하는 사회다. 마이클 패런티는 이런 현실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사회적 논쟁거리로 만드는 노력이 무고한 희생을 소멸시키는 행동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정치를 연구하는 것 자체가 곧 정치행위”라고 일깨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점은 “누가 지배하는가?”와 함께 “누가 이득을 얻고 있는가?”를 깊게 따져 묻는 태도이며 이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령 대장동 사건도 이런 각도에서 보면 그대로 답이 나온다. 특별할 것이 없는 상식적 질문이지만 이 질문은 언론에 의해 대체로 증발되기 일쑤이다. 그래서 더더욱 이 질문을 꼭 붙들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해진다. 우리는 대장동 뇌물 사건에 급기야는 현직 대법관 연루라는 보도까지 접하게 되었으니 한국 정치에서 격파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법의 불평등’을 주도하는 세력이 바로 그 법에 대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현실은 따라서 철저하게 분쇄되어야 한다. 법정의 공간구조부터 완전히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재판관은 높은 상석에 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보다 아래에 앉아야 하는 것은 이미 불평등한 권력질서다.

 

재판관이 입장하면 모두 일어서야 하는 것도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아직까지 고치지 않고 있는 게 기이한 습속이다. 뿐만 아니라 재판관을 부를 때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을 붙이지 않을 경우 법정을 모독하는 ‘경칠 인간’이 되어버리는 현실은 속히 내버려야 할 봉건적 유제(遺制) 일뿐이다. 그건 상호적이지 않은 “인간 능멸의 풍속”이다.

 

이런 공간구조는 법정의 권위를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 법관의 오만을 제도화할 뿐이며 시민들은 그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법의 존중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법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약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에 대해 그 현장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법의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신(神)뿐이지 않은가?

 

신조차도 인간이 되어 그 밑바닥에까지 내려가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예수의 이야기는 이런 모든 봉건적 권위주의가 얼마나 야만적인가 하는 것을 일깨운다. 이 일깨움을 받아들이지 않는 법정의 구조와 법관의 의식은 자신이 신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세상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내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모든 나라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건 반드시 타파되어야 할 낡은 시스템이다.

 

그 대안은 오로지 “시민법정”일뿐이다. 법률가는 법적 권력의 행사자가 아니라 전문적 조언의 역할에 그쳐야 옳다. 법이 시민의 상식과 논리를 넘어서면 그건 폭력이다.

 

흑인들의 해방을 외치며 결성된 블랙팬더 재판이 진행 중이었던 1971년의 뉴욕 법정의 상황을 돌아보자. 피고가 된 이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이들의 목소리가 집단으로 들리게 되자 재판장인 존 머타(John Murtagh)가 “법정모독죄”를 선언한다.

 

그러자 피고석에 앉아 있던 리차드 무어가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우리가 법정 모독을 했다고? 당신이야 말로 정의를 모독하고 있소. 백인들은 이 나라에서 흑인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고 지난 300년간 모독해온 사실을 모르오?”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의견을 서로 주고받는 권리조차 봉쇄해버리고 이를 시끄럽다며 법정모독으로 몰아간 기존질서에 대한 주저없는 반격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작업에는 엄청난 용기가 요구된다.

 

 

인권변호사이자 형법전문 법학 교수로 활동해온 마이클 타이거(Michael Tigar)는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미국 대법원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가들을 석방시키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로써 그 역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후 그는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상대로 그에게 희생된 이들을 옹호하는 운동과 함께 고문과 살인 혐의로 피노체트를 기소하는 운동도 벌였다. 인권과 정의가 법으로 구현되지 않는 사회는 야만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그의 소신과 의지의 발동이었다.

 

 

이때 그가 택한 원칙은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하지 않는다(Not As Usual)”이다. 부당한 질서를 격파하기 위한 첫 번째 문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회고록 『정의가 무너지는 것에 민감하라(Sensing Injustice)』는 우리의 현실에서도 필독서다. 아직 번역되지 않았으니 역서(譯書)가 발간되어 널리 읽혔으면 하는 책이다.

 

바로 이렇게 당연하게 여겨온 ‘법의 명령과 제도’에 대해 그걸 계속해오던 대로 하는 게 옳은가를 묻는 행위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행동이 된다. 예를 들어 지금 한국사회가 대선을 치르고 있는 과정에서 선관위의 선거관리는 중대한 자가당착의 모순을 당연한 논리처럼 내세우고 있다는 걸 모두 알 필요가 있다.

 

촛불혁명 완수를 가치로 삼는 시민들의 연대조직인 《개혁과전환 촛불행동연대》가 정치검찰의 국가권력 장악을 저지하기 위한 현수막 행동전에 들어가자 현수막 문구를 문제삼아 선관위가 제동을 거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데 동일한 문건을 정당은 되고 일반시민은 불허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뿐만 아니라 현수막 제작업체의 내용까지 자료로 제출하라면서 마치 수사기관처럼 월권까지 한다. 시민의 정치기본권을 침해하고 시민들을 협박하는 태도이니 경악스럽지 않을 수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는 선관위가 이렇게 시민들의 정치기본권을 훼손하는 것은 중대한 사태다. 선거의 공간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과 과제를 누구나 자유롭게 거론하고 의사표시를 해서 올바른 선택으로 가는 길을 여는 공동체 전체의 정치적 축제다. 그런데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단속하는 것을 법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면 이는 선거 자체에 대한 부정이다. 축제는 사라진다.

 

만일 그런 논리에 따라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가 문제가 된다면 정당과 언론은 선거기간 중에 모든 행동을 정지해야 하는데 이게 말이 되는가? 선거의 공간은 당연히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을 토대로 하는 것인데 이를 문제 삼는다면 그런 선관위야 말로 “선거에 영향을 ‘나쁘게’ 미치는” 장본인이 된다. 그렇다면 더는 존재 이유가 없는 기관이다.

 

유권해석의 과정도 없이 범죄혐의 운운으로 걸고 1년 이하의 징역 등으로 시민을 겁박하기까지 한다. 이런 선관위는 말하자면 법정에서 상석에 자동적으로 앉는 법관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구조가 당연하게 여겨지면 시민들은 부당한 법에 굴종을 강요당한다. 이는 같은 사안에도 정당에게는 권리인정을, 시민에게는 권리박탈이라는 “법 앞에서의 불평등”을 대단히 위협적으로 관철하려 드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굴종의 거부,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파시즘으로 궤멸된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은 일종의 계급 타협적 산물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현실에 존재하는 계급적 갈등과 모순을 은폐하면서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법 앞에서의 불평등의 문제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걸 적극적으로 풀어나갈 의지를 담지 않은 헌법은 그 갈등을 이용한 파시즘 세력에 의해 반격당하고 무너져 내려앉는다. 이 문제를 깊게 파고든 프란츠 노이만(Franz Neumann)의 역작 『괴물(Behemoth)』의 분석이다.

 

그는 “현실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적대적 갈등을 대의제 속에 담아 은폐해버린 결과 파시즘 세력을 진압하는 정치가 붕괴되고 말았다”고 갈파한다. 이런 그의 주장은 우리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촛불혁명 정부를 자임했던 문재인 정부는 출범후 얼마 지나지 않아 '촛불혁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 시작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연설에서 촛불혁명의 그림자도 볼 수 없게 되었고 “협치”라는 방식으로 갈등을 은폐하고 타협하는 노선을 취하면서 프란츠 노이만의 말대로 파시즘 세력의 반격 앞에서 휘청거리게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법 앞에서의 불평등 구조”를 혁신할 수 있는 시민의 정치적 의지와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스스로 시민들로부터 고립을 자초하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 안에 촛불혁명의 동력은 그렇게 꺼져 버렸다. 그 결과는 검찰 쿠데타의 주모자와 주도세력의 정치력 확장이었고 이를 막아내려는 시민들만이 지금도 고통을 치르는 중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들 정치검찰은 검찰개혁을 요구한 시민들을 “무법천지를 만들어 사법처리가 되어야 할 자들”이라고 규정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에 대한 비판은 일체 없는 채 이들이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것만 문제삼고 분노했다. ‘시민이 없는 정부의 지독한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이제 다시 “법 앞에서의 불평등”으로 돌아가보자. 법의 명령이 인권을 유린하고 시민의 정치적 기본권을 침해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면, 이에 그대로 굴종할 것인가?

 

 

우리를 모독하고 능멸하는 법의 명령은 당연히 거부해야 옳다. 베트남 전쟁에 징병제로 동원되는 것을 거부했던 청년들은 바로 그 굴종의 현실에 반기(反旗)를 들었다. 마이클 타이거는 이 반기의 최전선에서 법의 정의를 세우는 투쟁을 벌여 성공했다. 법의 불평등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노예의 정치다. 육법전서로는 혁명을 하지 못한다고 했던 시인 김수영의 시 "육법전서와 혁명"은 이걸 제대로 본 통찰이다.

 

이에 대한 굴종을 거부하는 생각 자체가 이미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정치가 우리에게서 표는 가져가고 정작 지켜주는 것은 강자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체제 변혁은 이렇게 기존질서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는 데서 비롯된다.

 

법은 절대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법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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