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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서정(抒情)으로 혁명하라!

66. 아치의 노래, 정태춘 - 고영재

 

가수 정태춘은 멜로디도 멜로디지만 무엇보다 귀에 꽂히는 가사가 먼저 기억되는 인물이다. 진부한 표현으로 음유시인이란 소리를 하는데 그런 면에서 그는 거의 독보적이다. 정태춘만큼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이는 싱어송라이터는, 한국에 없다.

 

그의 초기작 ‘시인의 마을’의 가사는 일찍부터 그가 범상치 않은 뮤지션이라는 것을 알렸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테요’ 그렇게 시인처럼 등장했던 정태춘은 곧 세상과 시대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드메뇨(떠나가는 배)’,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92년 장마 종로에서)’가 그랬다.

 

그러나 ‘아치의 노래’와 ‘건너간다’라는 노래를 발표할 즈음인 2002년 이후 그는 파업과 농성의 현장에 자신을 더 투신했고 그렇게 대중에게서 잊혀 갔다. ‘건너간다’의 가사가 그걸 암시했다. ‘흔들리는 대로 눈 감고 라디오 소리에도 귀 막고/ 아, 검은 물결 강을 건너 아,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간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다시 돌아왔다. 40여 년만의 일이다. 2019년에는 데뷔 40주년 기념 전국 투어를 다녔다. 데뷔 44년째인 올해는 다큐멘터리 ‘아치의 노래 정태춘’으로 대중 앞에 선다. 사람들은 그가 여전히, 우리의 뒤에서 꿋꿋하게 우리와 함께 동반해 왔음을 새삼 느낄 수 있게 됐다.

 

 

정태춘의 노래와 그의 노래 인생의 얘기를 그린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지난 40여 년간 그가 불렀던 주옥같은 노래들을 비교적 거의 온전히 다 들을 수 있는, 음악 다큐멘터리이다. 이런 류의 영화는 마치 3단 케이크를 먹는 일과 같아서, 세 가지의 케이크가 입안에 들어가는 형국이다. 그 하나는 노래이고, 다른 하나는 가수(의 인생)의 이야기이며, 마지막 하나는 세상·시대의 얘기다.

 

예컨대 말릭 벤젤룰이 만들어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상을 받은 ‘서칭 포 슈가맨’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 영화에는 미국 레이건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온 디트로이트 노동자 가수 시스토 로드리게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래·가수·시대라는 3단 케이크가 잘 구워져 있다. 음악 다큐의 최고봉이자 걸작이다. 그러나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서칭 포 슈가맨’보다는 베일리 월쉬가 만들었던 2013년작 ‘브루스 스프링스틴, 특별한 전설(Springsteen & I)’에 보다 가까운 작품이다. 노래·가수·시대라는 세 가지 요소 중 둘 다 노래에 주된 방점을 찍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건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 고영재의 정치(精緻)한 고민의 귀결일 수 있겠다.

 

정태춘의 인생과 그가 걷고, 살았던 시대는 어쩌면 그의 노래 가사에 모두 실려 있다. 정태춘은 노래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인생과 세상을 더불어 그려 나갈 수 있는 존재이다. 정태춘을 보고 있으면 노래하는 가수가 결국 세상을 향한 투사가 되는 것이지, 정치적 인물이 노래와 시를 읊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느끼게 해 준다. 그는 처음부터 가.수.였고 지금까지 여전히 가.수.이다. 다큐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 보여주려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정치가 모든 세상의 이슈를 덮고 모든 삶의 선행지수처럼 된 요즘, 정태춘의 다큐는 정치 이전에 먼저 노래를 부르고 시를 써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보다 정확하게는 가수 같은 사람, 시인 같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혁명 이전에, 서정적 감수성의 회복이 먼저이다. 혁명가가 시를 쓰는 것보다 시인이 혁명을 하는 것이 맞다.

 

 

‘아치의 노래, 정태춘’의 제목에 정태춘의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노래인 ‘아치의 노래’가 들어간 이유는 바로 그러한 점을 보여 준다. ‘아치의 노래’에서 ‘아치’는 양아치이다. 양아치는 원래 넝마주이를 뜻했다.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밀려나 있었던, 최극단의 존재들이었다. 정태춘은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그가 깊이 잠드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 가끔/ 한 쪽 다리씩 길게/ 기지개를 켜거나/ 깜빡 잠을 자는 것 말고는/ 그는 늘 그 안/ 막대기 정 가운데에/ 앉아서 노랠 부르고/ 또 가끔 깃털을 고르고/ 부릴 다듬고/ 또/ 물과 모이를 먹는다’.

 

감독 고영재는 이 노래의 가사만큼 정태춘이란 가수의 아우라 전체를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봤을 것이다. ‘아치의 노래’ 가사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하고 소외돼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루한 사람들의 인생을 얘기하는 노래는 없다. 이 노래만큼 서정적 혁명주의의 완결판은 없다. 감독 고영재가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꽤나, 아주아주 대단히, 혁명성을 지닌 작품이다. 의도한 것은 아닐지언정 이 영화가 갖는 시대적 휘발성은 감독 고영재와 주인공 정태춘 스스로의 소망과 달리 매우 폭발적일 수밖에 없다. 개봉 이후 관객들의 반응은 그런 식으로 모아질 것이다.

 

영화는 ‘서칭 포 슈가맨’보다 ‘브루스 스프링스틴, 특별한 전설’에 가깝지만 뮤지션으로 보면 정태춘은 스프링스틴보다 슈가맨의 시스토 로드리게스에 가깝다. 문학적인 면에서는 막심 고리끼이다. 정태춘의 노래와 삶 역시 그들처럼 ‘현장’에서 성장했다. 변혁의 과정에서 업그레이드됐다. 그것이 더욱더 그를 진솔하게 빛나게 만든다. 다큐는 바로 그 빛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이번 다큐에서 1998년에 발표된 그의 노래 ‘5.18’을 거의 전곡 그대로 들을 수 있게 한 것 역시 상당 부분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주려 했던 소산의 결과이다. 이 영화는 5월 18일에 개봉된다. 영화에서 정태춘이 지난해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마치 성명처럼 노랫말을 읊을 때, 관객 속 누군가가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 “정태춘 씨, 우리는 당신의 노래를 들으러 왔지, 이념을 들으러 온 게 아니오!” 서늘하다. 어쩌면 아주 짧은 그 장면 하나가 지금의 폭압적인, 윤석열 시대를 예고해 온 것이 아니냐는 무언의 설명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태춘은 무대에서 굴하지 않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마치 저런 사람은 늘 예상했다는 듯이 동요하지 않고 ‘5.18’을 부른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이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고영재 감독이 만든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 그 어느 영화, 그 어느 드라마, 그 어느 노래, 심지어 그 어느 집회, 그 어느 농성보다 더욱더 파장이 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예상컨대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많이들 울 것이다. 정태춘의 서정(抒情)이 지닌 시대적 진심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