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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65. 상상도 못할 성남의 옛 모습

1971년 8월 10일, 51년 전 광주대단지 사건 그날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주민들은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하였고, 오늘은 그 51주년이 되는 날이다.


폭동, 난동 등 과격한 용어로 불려진 이날의 시위는 서울시의 한심한 정책이 자초한 것이었고 예상된 것이었다. 서울시가 13만  6500동의 무허가 판잣집을 철거하기 위해 수립한 광주대단지 계획은 기본적 생활환경과 생계대책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었던 주민들로서는 정당한 권리를 요구한 것이었다.

 

 
"모이자, 뭉치자, 궐기하자, 시정(是正) 대열에!"라는 전단지가 뿌려졌고, 장맛비가 쏟아지는데도 주민들은 순식간에 5만 명으로 불어났다. 양택식 서울시장이 약속된 11시에 나타나지 않자 군중들의 분노는 폭발하였다. "배고파 우는 사람 세금으로 자극 말라", "일자리를 달라", "천원에 매수한 땅 만원에 폭리 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출장소와 관용차·경찰차를 불태우고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항쟁이 전개됐다.
 


광주대단지가 생기기 전에는 숯굽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던 산촌마을이었다. 숯골, 탄동(炭洞), 탄리(炭里), 탄천(炭川)이 이 고장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명들이다. 그런데 광주대단지 조성 이후 성남시 승격 초기에 수많은 새로운 별칭이 생겨났다. ‘구름 위에 세워진 도시’, ‘8도 합중시’, ‘한국 속의 아메리카합중국’, ‘인공도시’, ‘고적(古蹟) 드문 신천지’, ‘별난 얼굴의 도시’ 등이 그것이다. 합중시는 전국 8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형성되었기 때문에 생긴 별칭이다. 주민들이 개척정신이 왕성하고 정력적이고 시민의 자질이 우수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현재 성남시는 전국에서 부러워하는 도시로 변모했다. 도시 발전과정에서 도시 구조의 대표적인 변화는 주택의 변화이다. 광주대단지 이전의 전통가옥은 초가집이거나 돌을 얇게 켜서 지붕을 얹은 ‘돌기와집’이나 ‘기와집’이었다. 창곡동에도 돌기와집이 몇 채 있었는데 위례신도시 건설로 사라졌다.

 


광주대단지 입주증을 ‘딱지’라고 불렀다. 서울시는 1가구당 20평씩 평당 2천 원에 분양 해주고, 그 대금을 2년 거치 3년 상환토록 했으나, 부동산 투기 붐이 일면서 평당 8천~1만 6천 원으로 치솟자 땅값을 일시불로 내게 하고, 취득세·재산세·영업세·소득세 등 각종 세금을 부과했다.
 

 


철거민들이 처음 살게 된 것은 ‘천막’과 ‘판잣집’이었다. 광주대단지에는 집이 없었고, 산을 깎아내고 바둑판처럼 줄이 그어진 황무지 땅만 있었다. 여기에 서울시가 설치한 대형천막에 여러 가족이 함께 거주해야 했다. 일가족이 천막 속에서 얼어 죽기도 했고, 일곱 식구가 한 평 반 천막에 포개서 자야 했다. 천막생활에서 조금 나아진 것이 판잣집인데 서울에서는 무허가였고, 광주대단지에서는 허가 난 것일 뿐 생활상은 오히려 나빠졌다.
 
그런데 서울의 무허가 판잣집에 세 들어 살다가 함께 철거돼 온 주민들에게는 그나마 20평의 ‘딱지’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단지 안에 다시 무허가로 판잣집을 짓고 살았는데, 무려 5121채에 달했다. 이들 4300가구 2만여 명은 다시 ‘달나라 별나라’로 불렸던 은행동 일대로 다시 이주 되어 8평의 땅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삿갓집’이라고 하는 움막을 짓고, 장마철이면 넘쳐흐르는 재래식 변소 6개를 공동 사용해야 했다. 90년대 까지 금광2동과 은행동 지역을 ‘한성1,2,3지구’. ‘자혜촌(慈惠村)’이라고 불렀다.
 

 

판잣집보다 나아진 게 ‘루삥집’=루핑(roofing)집이다. 아스팔트 콜타르 찌꺼기로 코팅을 한 두꺼운 종이로 지붕을 덮은 집이다. 그 후로 부로꾸(block)집, 벽돌집, 함석집, 슬레이트집이 생겨났다. 함석집과 루삥집은 장대비가 쏟아지면 지붕이 콩 볶는 소리처럼 요란했다.
 

 

성남에 속칭 ‘비둘기집’이라 불리는 ‘새마을주택’도 지어졌다. 단대천을 따라 금광동 방향으로 10평 정도의 공간에 벽돌을 쌓고 지붕만 얹어서 분양했는데 줄지어 똑같은 모양의 집이 들어서서 비둘기집이라고 불렀다.

 


주민들 스스로 인력을 보태는 ‘자조주택(自助住宅, self-help housing)’이 많았다. 주거지 건설 또는 기존 주택을 개량하는 과정에서 주민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 함으로써 공급가격을 낮추려는 정책이다. 성남시 초기의 주택들은 어떤 형태이든 자조주택이 대부분이었다. 이 과정에서 건축자재를 판매하는 가게들은 ‘한강모래’, ‘한강자갈’ 등 토박이 모래나 자갈과 차별화 하는 선전을 하기도 했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