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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선감학원 진실규명 결정까지…흘러 보낸 80년 세월 속 경기도 역할은

선감학원, 1946년부터 경기도가 운영…40여 년 간 이어진 '국가폭력'
1957년 조례 있었음에도 ‘무용지물’…할당량 못 채우면 ‘폭력은 일상
일본인 이하라 소설 통해 세상에 드러나…피해자들 하나둘 ‘목소리’
선감학원 피해자 진실규명 요구 탄원서 작성 후 진실규명까지 ‘10년’

 

‘선감학원’ 소년들이 머리가 희끗해질 때쯤 한(恨)을 풀었다. 선감학원 폐원 후 무려 40년의 세월이 흘러서다. 지난 20일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으로 가해자인 경기도는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례적인 공식 사과에 피해자들은 벅찬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연신 눈물만 흘렸다. 이들의 눈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경기신문은 선감학원 설립부터 폐원 후 진실규명 결정까지 80년 세월 속 과정들을 세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선감학원 사건 진실규명 결정까지…‘경기도 역할론’

<계속>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츠(井原宏光)는 8살이던 해인 1942년, 선감학원 부원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안산시 선감도에 위치한 선감학원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낸다.

 

이하라는 자신과 다른 선감학원 또래 친구들의 비극적인 삶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는 소년들이 배고픔에 시달리며 단체 기합을 받고 논·밭·염전 등에서 힘겹게 일하던 당시를 목격했다. 

 

그는 고된 삶을 견디다 못해 탈출하다 다시 잡혀온 한 소년이 죽도로 두들겨 맞아 피를 쏟아내 마당의 돌을 적시는 모습도, 익사한 채로 발견된 소년이 인근 야산에서 암매장되는 참상도 잊을 수 없었다.

 

설립 당시인 1942년부터 폐원한 1982년까지 40년 간 선감학원 소년들을 상대로 자행된 끔찍한 인권침해가 ‘사실’ 임을 인정받기까지는 그 이후 40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이하라가 자신의 어릴 때 목도했던 비참한 광경과 추가 취재를 바탕으로 1989년 발표한 ‘아! 선감도’라는 자전소설을 통해서였다. 

 

 

◇ 끔찍한 국가폭력이 자행된 ‘거리 천사들의 낙원’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가 1942년 5월 29일 안산시 외딴섬인 선감도에 감화원(感化院)으로서 ‘부랑아 교화’를 명목으로 세운 ‘아동 강제수용소’다. 

 

해방 후인 1946년부터 1982년 폐원까지 40년 동안에는 경기도가 시설 운영을 맡았다. 도는 운영 초부터 거리의 아이들을 ‘부랑아’로 칭하고 선감학원을 ‘거리 천사들의 낙원’이라고 명명하며 대대적인 홍보 등을 통해 ‘부랑아 강제 수집’에 나섰다. 

 

경기신문이 확인한 결과 1948년 4월 1일자 중앙신문에는 ‘선감학원을 찾아라, 태양과 함께 자라나는 버림받은 천사, 봄바다에 안긴 그들의 천지’라는 제목의 기사가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기사는 “해방과 함께 부쩍 늘어만 가는 거리의 천사들, 그러나 여기에 봄바람을 마음껏 마시며 태양과 함께 웃는 그들의 신천지가 있다”며 선감학원을 소개한다. 

 

이어 “해방 이후 430만 원 이상의 경비로서 확충하고 있는 경기도령 선감학원이니 (선감학원으로 가는) 지난 27~29일 3일간 원아들과 함께 놀고 자고 먹으며 두루 그네들이 새로 뻗어 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기사와 실상은 달랐다. 당시 단속 실적을 근무평점에 반영하던 탓에 도 경찰·공무원 등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거주지가 명확하고 가족이 있는 아이들도 부랑아로 위장 납치해 선감학원에 보냈다. 사료에 따르면 아이들 중 3분의 2는 부모나 연고자가 있었다.

 

도는 이렇게 모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선감학원을 운영했는데 설립 후 10여 년이 지난 1957년에서야 선감학원의 설치·보호수용의 근거인 ‘선감학원 조례’를 본격 제정·시행한다.

 

조례에는 제1조 ‘부랑아의 수용보호 및 직업보도를 위해 선감학원을 둔다’는 설치 목적 외에 원생을 대상으로 한 구체적인 운영방안 등은 담기지 않았다. 

 

조례는 1982년 선감학원 폐원 때까지 총 7차례나 개정됐는데도 원생들의 수용 절차나 보호 기간 등 운영 방법에 대해선 명시된 바가 없었다. 

 

선감학원을 운영하는 구성원은 경기도지사가 직종과 정원 등을 정해 조직·임명하고, 원장은 지방사회사무관이 도지사의 명령에 따라 소속 공무원을 지휘·감독하도록 했다. 

 

이에 도는 1951년부터 1982년까지 총 10명의 선감학원 원장을 지방사회사무관으로 임명했고, 1953년에는 총 10명의 도 지방직 공무원이 선감학원을 관리·운영했다. 1958년에는 9명, 1972년 7명, 1982년에는 사무관 1명, 주사 1명 등 6명을 파견했다. 

 

 

생존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선감학원에선 40년 간 5000명이 넘는 원생들을 대상으로 ‘원산폭격’ 등 체벌 목적의 단체 기합과 폭행·성폭행·학대·고문·굶주림·암매장 등이 이뤄졌다. 

 

소년들은 선감도 일대의 논과 밭, 염전, 원장 관사 등에서 무보수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피해자 안모씨는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등 선감도 일대를 일군 건 원생들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1일 할당량을 전부 채우지 못하면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원산폭격’ ‘한강철교’ ‘나룻배’ 등으로 불린 단체기합 등의 폭력은 도 공무원을 포함해 기숙사 반장 등 선임기수를 통해서도 이뤄졌다.

 

 

특히 1964년 선감학원 조례에선 ‘의무교육학령아동의 취학 및 성적이 우수한 학생의 진학에 관한 사항’이 신설됐지만, 중학교까지 진학을 한 이는 한 학년에 열손가락을 꼽기도 어려울 정도로 학령에 따른 교육을 받지 못하는 소년들이 대부분이었다. 

 

경기도지사들은 도립 선감학원 시찰을 위해 종종 방문했는데 이 같은 ‘특별한 경우’엔 선감학원에서 새 옷과 좋은 음식을 주고 늘 이렇게 생활한다는 말을 강요받았다고 피해자들은 증언했다. 

 

그러다 선감학원을 취재하기 위해 방문했던 몇몇 기자들이 소년들로부터 실상을 듣게 되면서 선감학원의 현실이 경향신문, 경인일보, 인천신문 등 언론을 통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제11대 박태원 경기도지사는 선감학원을 시찰한 후 “운영방식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겠다”고 했으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정부 방침에 따라 각종 사업소 통폐합 및 민간위탁하면서 선감학원도 민간위탁이 논의됐지만 위탁운영자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결국 1982년 폐쇄됐다. 

 

 

◇ 선감학원 인권침해 40년 만에 이뤄진 ‘진실규명’

 

그동안 숨겨졌던 소년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드러난 건 이하라 히로미츠의 자전소설 ‘아! 선감도’를 통해서였다. 이하라가 선감학원 위령비 건설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3년에는 선감학원 피해자들이 김문수 지사에게 진실규명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탄원서에는 선감도에 보내진 순간부터 퇴원 이후까지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고통의 목소리가 담겼다.  

 

2015년 10월 부좌현(안산단원을) 의원이 국회 국정감사에서 선감학원 사건 진상조사를 요구하면서 경기도의회 본회의 자리에서 남경필 지사는 선감학원 사건 진상규명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2016년부터는 도에서 희생자를 위한 공식 추모제를 매년 실시하고 있다. 

 

이후 도의회에서 ‘선감학원 진상조사 및 지원대책 마련 특별위원회’가 구성 결의되고 ‘선감학원 아동·청소년 인권유린사건 피해조사 및 위령사업에 관한 조례’가 제정된다. 

 

2017년에는 도의회가 선감학원 희생자 및 피해자에 대한 특별법 제정 촉구를 결의하고, 도는 선감학원 사건 희생자 유해발굴을 위한 사전조사 계획 수립 용역에 착수한다.

 

선감학원의 소년들이 모여 1990년대 초 친목 단체 성격이었던 생존자 모임회는 2018년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라는 이름으로 공식 활동하기 시작하며 피해자들은 점차 고개를 들고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2019년 1월에는 이재명 지사가 처음으로 피해자들과 공식 면담하고, 도를 대표해 피해자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공식 사과를 건넸다. 

 

2020년 들어서면서 도는 선감학원 피해자들을 위한 노력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4월에는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 신고센터 운영을 시작했고, 경기연구원이 연구 용역을 통해 선감학원 사건 피해 사례 조사 분석 보고서를 발간했다.

 

 

40여 년이 지난 12월 10일 비로소 김영배 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을 비롯한 166명의 선감학원 피해자들과 이재강 전 도 평화부지사는 진실규명 결정 신청서를 제출했다. 

 

신청서에는 선감학원에서 이뤄졌던 인권침해 피해와 함께 국가 차원의 사과와 생존자에 대한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후 그 다음해 5월 27일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을 위해 조사개시를 했다. 지난달 26일부터 진실화해위의 유해 시굴 작업으로 치아 68개와 원복에 달린 단추 6개를 찾아냈고, 진실규명 결정이 이뤄지면서 역사적인 순간을 맞았다. 

 

 

진실규명 결정 이후 김동연 지사는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피해자들에 대한 구체적 지원 방안으로 ▲피해자 생활 지원 ▲피해자 트라우마 해소 및 의료서비스 지원 ▲묘역 정비와 희생자 추모 및 기념사업 추진 등을 시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피해자들은 40여 년의 억울함이 풀린 듯 눈물을 쏟아냈다. 천종수 씨는 “김동연 지사님께 사과를 받으니까 오늘 집에 가서 발을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소회를 전하며 “김 지사님께서 (희생자들을 위한 지원책 마련 등) 약속한 걸로 저희는 알고 있겠다”고 전했다. 

 

[ 경기신문 = 김혜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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