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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행 칼럼] 입전수수(入廛垂手)

 

서양화가 장욱진(1917~1990)의 그림에는 주로 나무와 새, 소, 달, 산, 사람 등이 등장하는데 표정 하나하나가 우스꽝스럽다. 어느 하나 특출 난 것 없이 두루뭉술하다. 모두 어깨동무를 한 것 같다. 이 때문인지 장욱진의 그림 세계를 불교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수행의 십우도(十牛圖) 중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入廛垂手)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입전수수는 이른바 깨달음을 성취하고 난 뒤 중생 속에서 아픔을 함께하는 보살도의 단계다. 한자 '전(廛)'이 말뜻을 잘 나타낸다. '전빵(전방)'의 '전'자와 같은데 가게를 상형한 것이다. 가게는 저잣거리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입전수수는 저잣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쉽게 풀이가 된다.

 

저잣거리에서 대중들과 함께 한 이들이 어디 한 둘이겠느냐만 한 사람만 꼽으라면 우리는 신라시대의 원효를 드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머리를 기른 채 저잣거리에서 춤을 추는 퍼포먼스를 서슴지 않았다. 부처가 대중 속에 깃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승려와 신도, 엘리트와 대중, 권력자와 피지배층이라는 이분법이 들어설 틈이 없었다.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도 초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후는 원효 지우기 시대였다. 특히 조선은 억불숭유 정책으로 원효의 많은 것들을 사장시켰다. 중국과 일본이 그의 저서를 깊이 연구하면서 보급했던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그런데도 원효는 지워지지 않았다. 이 땅에 살았던 대중들의 가슴에 살아남았기에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왔던 것이다.

 

원효가 잊혀지지 않고, 장욱진의 그림이 갈수록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는다는 건 한 편으로는 유감스런 일이다. 시대와 반비례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위화감, 정확히 표현하면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간격이 넓어졌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가 원효가 살았던 신라 후기보다 못한 사회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위화감의 정도라는 척도로 보면 생각은 달라진다.

 

최근 민주당 최고위원 서영교 의원이 70대 시민을 명예훼손과 모욕 혐의로 고소한 것은 상징적이다.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서 자신에게 "악성 세비(歲費) 기생충" 이라고 말했기 때문인데 이는 서 의원 일행이 화이팅을 외친 데 따른 항의에서 나온 해프닝이다. 표현에 있어 지나친 감이 있지만 이는 권력에 대한 주권자인 시민의 견제감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서 의원의 고소는 엘리트와 대중의 좁힐 수 없는 거리감 그 한 단면이어서 씁쓸하기만 하다.

 

사실 작금 정치인들이 대중을 대상화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들은 크고 작은 행사장에서 사진 찍기 등 이미지 연출은 기본이고 자화자찬을 긴 시간 동안 아무런 거리낌 없이 늘어놓는다. 대중은 그저 객일 뿐이다. 이들 뿐 아니라 국민 소득 상위 10% 안에 드는 기술 관료와 대학교수 등 전문직 종사자들, 일테면 이 나라 엘리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식인이 아니라 샐러리맨, 학력 네트워크를 통한 문화자본 특권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엘리트와 대중 간 간격은 더욱 굳어져 고착화 단계가 아닌가하는 착각마저 인다. 대중의 힘이 만만치 않은 시대에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장욱진의 그림이 빛나 보이고 원효가 그리운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입전수수란 말이 혁명의 언어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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