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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행 칼럼] AI인가, 이야기인가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소녀의 /지문(指紋)". 박용래 시인의 시 '코스모스' 일부분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무수한 이야기가 상상의 나래를 펴고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빵 한 쪽 살 수 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가슴이 뛰고 풍부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첫 사랑은 이야기다.

 

필자에게도 첫 사랑은 이야기다. 고교시절 초등학교 동창 여자아이와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매수가 매번 10장 분량이었다. 200자 원고지로 치면 40~50장 정도였으니 그 시절 쌓았던 이야기는 공주 공산성을 구축하고도 남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편지는 돌아오지 않는 그녀의 지문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첫 사랑에만 얹혀있는 게 아니다. 목로주점에 가서 단 5분만 있어보라. 사람 수 몇 곱절 분량의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걸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라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거미줄을 떠나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죽어서도 이야기로 남는다. 오죽했으면 조너선 갓셜이 그의 명저 『스토리텔링 애니멀』에서 "인간에게 이야기는 물고기에게 물과 같은 것, 다시 말해 어디에나 있지만 지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을까?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에서 인간의 이야기도 얼마든지 인공지능(AI)이 대체 가능하다고 설파하였다. AI가 만든 곡을 청중들이 듣고 인간이 만든 곡을 들었을 때처럼 감동한 사례를 들었다. 실제 소설이나 시 창작도 너무 쉬운 일이어서 해당 프로그램에 누구나 핵심어만 입력하면 근사한 작품을 받아볼 수 있다. 자연과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의 생화학적 알고리즘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하라리는 전작 『사피엔스』에서 '길가메시 서사시'를 패배주의로 못 박으며 인간은 유한적 존재라는 메시지를 부정한다. "사람이 죽는 것은 기술적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스레 알고리즘을 통해 인간이 신(데우스)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끝내 하라리는 『호모데우스-미래의 역사』에서 "무한성장에 기반한 경제에는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불멸, 행복, 신성은 이러한 프로젝트로 안성맞춤"이라며 AI가 인간을 불멸과 행복, 신성으로 이끌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의 주장은 "검증되지 않은 과학을 통한 미래 예언"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김동광 고려대 과학기술연구소 연구교수는 녹색평론 2020년 1-2월 호에서 "유발 하라리가 펼치는 주장의 근거는 놀랄 만큼 취약하다”며 "그는 마치 과학이 모든 것을 밝혀내기라도 한듯 죽음의 정복과 알고리즘으로의 업그레이드를 주장 한다"고 꼬집었다. 빅히스토리(거대사)를 짜기 위한 예언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AI의 유용성이 커진다하더라도 인간의 가치로 통제할 수 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한다. 소설 등 이야기 영역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이야기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사건적 존재여야하기 때문에 AI는 보조물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이야기는 인간의 자기정체성이자 인간다움이다. 지금 당신이 무심코 내뱉는 이야기는 첫사랑이 아니라하더라도 결코 단순한 게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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