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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참 군인 김오랑과 비겁했던 그의 동기생들

 

영화 '서울의 봄'이 대흥행이다.

 

이 영화에서 배우 정해인은 짧은 배역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해인이 연기한 특전사 소령 오진호의 실제 인물은 김오랑 소령이다.

 

경남 김해 출신인 김오랑 소령은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를 한 해 늦게 졸업했지만, 김해농고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당시 수재들이 모이던 부산대 공대에 합격하고도 학비가 없어 들어가지 못했다. 학비가 무료인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해 제2보병사단 수색대 소대장으로 근무한 그는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귀국 후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시작으로 특전사령부 작전장교와 정보장교를 지냈다. 군의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제5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거쳐 1979년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1979년 12월 13일 00시15분, 전두환을 수괴로 한 반란군에 가담한 제3공수특전여단 최세창 준장 일당이 급습한 특수전사령관실을 끝까지 지킨 군인이 김오랑 소령이었다. 정병주 특전사사령관을 지키던 다른 장교들은 반란군의 회유와 협박에 모두 넘어갔지만 김오랑 소령은 반란 가담을 거부하고 자신의 사령관을 사수했다. 가진 무기라고는 권총 1정에 불과했던 그는 M16 소총으로 완전무장한 반란군 10명에게 가슴을 비롯한 전신에 6발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그를 사살한 10명의 반란군을 지휘한 자는 김오랑과 같은 군인아파트 아래윗집에 살던 박종규 중령이었다. 부인과 가족들도 서로 절친한 사이였다.

 

반란군에게 사살당한 참 군인 김오랑은 특전사령부 뒷산에 암매장되었다. 특전사 장병들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지자 3개월 뒤에 반란군들은 그의 시신을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했다. 권력을 탈취한 반란군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지켜보던 김오랑의 부모는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심각한 시력 장애를 지닌 그의 부인은 군인관사에서 쫓겨났다.

 

1987년 민주화 대투쟁 이후 그의 부인 백영옥은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중령 진급과 무공훈장추서를 요구하며 반란군 수괴 전두환과 김오랑 사살에 앞장선 최세창과 박종규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시도했다. 간신히 그의 중령 진급은 받아들여졌지만 소송은 외압으로 중단되었다.

참 군인의 귀감이었던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건립 건의안'이 18대 국회에서 발의되었다. 이 건의안에는 여야 의원 47명이 서명을 했는데 상정도 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어떤 의원도 이 안건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앞장서야 마땅할 육사 출신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단 한 명의 의원도 서명조차 하지 않았다. 더구나 18대 국회에는 김오랑의 육사 25기 동기생들이 세 명이나 있었다. 국민의 힘 전신인 한나라당의 황진하, 권경석의원, 민주당의 서종표 의원이 그들이다.

 

그 중에서도 하나회 출신으로 유신사무관으로 특채되어 내무부에서 고위공무원 생활을 한 권경석 의원은 동기 김오랑의 부인 백영옥씨가 1991년 6월 의문의 추락사를 당했을 때, 관할 부산 영도구청장이었다. 누구에게 화를 내겠는가. 이런 자들이 우리 군을 주무르고 관직을 마음껏 누린 것으로도 모자라다고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로 가도록 만든 것이 바로 우리 국민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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