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전이다. 내과수련의로 근무하던 때 지도교수님의 진료실은 화병환자가 많이 내원했다. 진료실과 입원실이 붐볐다. 그런데 화병을 치료해야지 하고 오지는 않았다. 대부분 가슴이 두근거리고 답답하고 아프거나 혹은 잠을 못자서였다. 손발이 저리고 얼굴로 열이 오르고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기도 했다. 이런 증상들과 함께 많은 경우 고혈압. 심장질환, 당뇨를 진단받아 양약 복용 중에 중풍증상을 나타내어 입원하는 경우도 많았다. 교수님은 그들에게서 화병을 진단해 내셨다.
화병환자들은 거의 대부분 기혼 50-70대 여성이었다. 화병의 제일 큰 원인인 남편, 시댁과의 관계에서의 상처. 경제적 곤란을 콕 찝어 질문하면 대부분 맞았다. 다음에 올 때 반드시 남편을 같이 오라고 하셨다. 부부상담을 하며 호통과 넉살을 섞은 상담에 환자들이 한바탕 울음을 쏟고 나서 미소를 띈 얼굴이 환해져서 진찰실을 나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교수님의 진료실에서 많은 환자들을 경험하였다. 자연스레 화병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고 논문을 여러편 썼다.
시간이 흘러 필자는 중견의 한의사가 되었다. 여전히 꼭 화병을 치료하려고 오지는 않는 20년전보다 더 다채로운 양상의 화병환자를 만나고 진단해낸다. 혈압, 심장질환. 당뇨에 더해서 만성방광염, 만성 질염, 만성신장염, 각종여성질환,아토피 피부염.류마티스 관절염. 섬유근통 다양하다. 20년전과 유사하지만 조금 더 다양한 사건이 있다. 남편,시댁,경제적 상황에 더해 며느리,황혼육아,직장에서의 갑질 혹은 동료들의 왕따에서, 가정폭력, 예기치 않은 파혼. 원하는 자아실현이 결혼과 육아에 의해 좌절되어서 발생하기도 한다.
화병은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해결되지 않고 계속 억울하고 분한 감정이 쌓여 발생한다.
감정이 참고 눌러지고 해소되지 않으면 12경락의 기혈소통에 장애가 생긴다. 이것이 치료되지 않고 누적되면 오장육부의 기능에 이상을 초래해서 다양한 질환이 발생한다. 한의학에서는 변증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화병의 다양한 패턴 진단한다. 오랜시간전부터 이러한 양상을 관찰하고 기술하였고 효과적으로 치료해왔다.
화병의 양상은 스트레스에서 자율신경의 이상반응으로 설명된다. 좀더 정교해진 심리학에서 스티븐 포지스의 다미주신경이론과도 만난다. 트라우마가 해소되지 않으면 투쟁, 도피 ,얼어붙기 방어반응으로 설명되는 몸에 증상이 나타난다. 교감신경항진 증상이 나타나서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근육이 긴장되고 소화가 안되는 등 급성화병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트라우마가 더 오래 지속되어 해결이 불가능한걸 알게 되면 과소반응 상태 즉, 무기력해지고 피곤해지고 우울해진다. 면역이 떨어지는 상태가 된다. 이렇게 화병이 진행되면 오히려 중추감작으로 뇌가 더 과민해진다. 스트레스에 더 민감해지는 악순환을 만든다.
화병을 치료해야하는 큰 필요성은 억눌린 감정이 오래되고 트라우마가 반복되고 해소되지 않으면 우울,불안장애 뿐만아니라 다양한 신체적인 병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