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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구 박사의 맛있는 인천 섬 이야기] ㉕땅콩밭 이었던, 백패킹의 성지 굴업도

  • 등록 2024.07.21 11:58:36
  • 14면

굴업도는 백패킹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 꼭 한번 방문해야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굴업도 개머리 능선에서 서해에 지는 낙조와 밤에 수많은 별과 은하수가 장관이다. 또 주변 경관이 좋아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방문한다.

 

주말에 덕적도 자도섬(문갑도·지도·울도·백아도)을 가려면 굴업도 가려는 사람들 때문에 배편이 없어 불편함이 많았다. 올 하반기부터는 인천항에서 배가 직접 출항한다고 해 그나마 다행이다.

 

 

굴업도는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90㎞, 덕적도에서 13㎞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다.

 

일제강점기에 충남 서산에 살던 분이 이주해 개머리 능선 등에 소를 방목(放牧)하다가 여의찮아 철수했다고 한다.

 

6·25 이후 이주해 온 피난민과 원주민들이 땅콩과 소를 기르면서 생활했고, 땅콩과 더덕이 많았던 섬이었다.

 

필자가 1990년 지인들과 굴업도로 여름휴가를 간 기억이 있다.

 

서포리에서 어선배를 타고 굴업도 선착장을 내렸다. 마을 언덕을 넘어가자, 더덕 향기가 진동했다. 더덕을 캐서 해수욕장에서 더덕구이를 먹고 있었다. 더덕향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와서 일행과 함께 나누어 먹던 기억이 나곤 한다. 지금도 더덕을 보면 그때 이야기를 한곤 한다.

 

1974년 덕적도 서포리에서 굴업도로 들어가 14년 동안 땅콩 농사를 지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 김굉배씨에 의하면, 당시 굴업도는 20가구 정도 살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땅콩을 재배해 처음에는 6가마 정도를 생산했다. 그 후 산을 개간해 재배 면적을 넓혀 생산량을 1년에 15~16가마로 늘렸고, 이후 20가마까지 수확한 적이 있다고 했다.

 

산 대부분이 모래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 방목을 위해 주변에 나무가 거의 없는 편이라 개간이 쉬웠다고 한다.

 

그렇다면 굴업도는 땅콩을 얼마나 생산했을까?

 

1972년 당시 내무부 자료를 바탕으로 덕적도 주변 섬들과 비교해 보면 땅콩 1인당 생산량은 덕적도 4.1㎏, 소야도 5.0㎏, 문갑도 9.8㎏, 백아도 7.4㎏, 울도 6.1㎏, 승봉도 9.0㎏인데 반해서 굴업도는 167㎏으로 월등히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또 면적 대비 두류(豆類) 생산량을 보면 덕적도 1.0톤, 소야도 3.8톤, 승봉도 1.1톤, 굴업도는 7.1톤을 차지하여 다른 섬보다 굴업도 콩류 생산량이 많았다.

 

“당시 땅콩 가격은 쌀의 2.5배로 비싼 편이었지. 굴업도 전체 생산량은 대략 가구당 평균 15가마 생산하고 20가구가 살았으니 일 년에 한 200~300가마 정도 생산한 것 같아. 수확한 땅콩은 직접 팔거나, 덕적도로 가지고 나와 최분도 신부님 소개로 천주교회를 통해서 팔았지.” - 고(故) 김굉배씨

 

경향신문(1987년 7월 1일자)에도 ‘굴업도에서 생산되는 땅콩은 연평균 150가마 정도이고, 고소한 맛이 뛰어나서 지난해에도 가마당 17만 원씩 팔아 마을에서 총 2500만 원의 소득을 올렸다’고 했다.

 

당시 굴업도에는 소도 많이 키웠다고 한다. 땅콩을 수확하고 남은 땅콩 잎을 소먹이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소는 한집에 보통 2마리 정도로 전체 6~70마리 정도였지. 1986~7년에 땅콩 값이 크게 하락하자 사람들이 굴업도를 떠나자, 나도 굴업도를 나왔다.” - 고(故) 김굉배씨

 

그렇다면 땅콩 값이 갑자기 하락했을까?

 

1981년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수입 개방 요구에 따라 공산품과 농산물을 개방했다.

 

땅콩의 대체 품목인 아몬드 수입도 1985년 345톤에서 1986년 621톤으로 2배 정도 증가했다. 아몬드 수입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땅콩의 영역을 잠식한 것이다.

 

사람들이 땅콩보다는 아몬드를 선호하면서 자연스레 땅콩 소비도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 정부에서 전체 땅콩 생산량의 28% 정도 만 땅콩을 수매하자 농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농산물 수입 개방에 따라 땅콩 및 대체품인 아몬드를 대량으로 수입되자 땅콩가격은 하락했다. 게다가 정부에서 땅콩 수매를 크게 줄이자, 사람들은 땅콩 농사를 포기했다.

 

그 결과 굴업도 땅콩은 1987년 전후로 구경하기 어려워졌다.

 

이후 정부에서는 소득증대 사업으로 염소를 사주고 연평산, 덕물산, 마을 근처에 염소 입식 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굴업도는 원래 민어 파시로 유명했으나, 1923년 8월 폭풍으로 130호의 가옥이 파손되고 200여 척의 민어잡이 배가 파괴 1000여 명의 선원이 행방불명됐다고 한다. 그 후 굴업도 사람들은 덕적도 북리로 이전했다.

 

지금도 굴업도 목기미 해변 옛날 포구 선착장 주변 등지에 민가 등 흔적이 있고, 모래를 파 보면 집터 등이 나온다.

 

 

글 : 김용구 박사(인천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인천시 섬발전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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