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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 문학 살롱 이야기] 최초의 살롱 ‘파란 방’

 

파란 방을 가진 랑부이예 호텔


전편에서 이야기했듯이 프랑스 문학 살롱의 기원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앙리 4세 통치가 끝날 무렵 궁정의 관습이 다소 천박해지자 파리의 귀족 여성들은 대화의 주도권을 되찾기로 결심하고 자택에 사교모임을 열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살롱은 랑부이예(Rambouillet) 부인이 운영한 파란 방이었다. 파란 방은 벽을 비롯한 방 안의 분위기가 파랑으로 꾸며져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당시는 벽이 대부분 빨간색이나 황갈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랑부이예 부인은 그런 색을 탈피하고 다른 색을 칠해 분위기를 독특하게 하였다. 

 

랑부이예 부인의 원래 이름은 카트린 드 비본(Catherine de Vivonne)으로 158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스페인과 프랑스 주재 이탈리아 대사였고 어머니는 귀족의 후예였다.

 

개성이 강한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에 능통하였다. 그녀의 집에는 아버지를 찾는 문인들이 자주 모였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머니는 이 모임에 딸이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렇게 그녀는 대화 문화 속에서 성장하였다.

 

예술과 문학에 관심이 많고 역사를 좋아했던 그녀는 11살 때 자신보다 두 배나 나이가 많은 프랑스의 랑부이예 후작과 결혼하여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은 그녀는 타락해 가는 궁정 문화에 반기를 들고 세상을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야겠다는 생각에 살롱을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 장 드 비본 후작의 호텔을 자신이 직접 설계한 계획에 따라 재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작가들이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하면서 기발한 단어를 뽑아내는 카드놀이도 할 수 있게 손수 디자인하였다. 이 호텔은 지금은 사라진 파리 1구의 생 토마 뒤 루브르 거리에 있었고 생토노레 거리와 직각을 이루고 있었다.

 

 

쾌락적이지만 속되지 않았던 살롱 문화

 

그녀는 앞마당에 잔디를 깔고 플라타너스 길을 조성하여 파리에서 유일하게 서재의 창문에서 풀 깎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방을 만들었다. 랑부이예 호텔은 모든 것이 웅장하고 심지어 특별하였다.

 

램프는 다른 곳과 다르며 캐비닛은 선택한 여성의 판단력을 보여주는 수천 가지의 희귀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공기는 항상 향기가 나고 꽃으로 가득 찬 여러 가지 웅장한 바구니가 그녀의 방에서 계속 봄날을 만들어 사람들을 마법 속에 머물게 하였다.

 

이 호텔에서 그녀가 리셉션을 시작한 것은 앙리 4세가 사망한 때였다. 그러나 최고의 순간은 1638년부터 1642년까지 루이 13세 통치 말기에 찾아왔다. 문인들은 점심 식사 후 ‘소화 시간’에 랑부이예 살롱을 찾아갔다. 그녀의 남편인 샤를 당겐은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딸 쥘리 당겐이 나와 어머니를 도왔다. 

 

그녀의 파란 방에서는 대화를 나누고, 책을 읽고, 연기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들었다. 보드게임을 즐기고 문학적 즉흥 연주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론도(뱅상 보부아르와 라퐁텐이 즐겨 쓴 시의 한 형태)와 수수께끼를 만들어 풀기도 했다. 버킹엄 공작을 맞이한 파티와 같은 특별한 행사가 열리기도 하였다. 

 

초창기 단골손님이었던 프랑수아 드 말에르브를 비롯한 16세기의 많은 시인, 작가, 문법학자들이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중에는 초기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첫 번째 회원도 있었다. 그리고 동시대의 유명한 역사가들을 묘사한 탈레망 데 레오도 있었다.

 

또한 랑부이예 부인은 명문가 출신의 젊고 아름다운 소녀들도 초대하였다. 몰리에르와, 코르네유는 잠깐 등장하다 사라졌다. 결국 랑부이예 호텔을 자주 방문한 것은 주로 이류, 삼류의 작가들이었지만 이 살롱의 명성과 영향력은 결코 손상되지 않았다. 

 

파란 방에 모인 지식인들은 교양 있게 말하지만 합리적으로 말하며, 쾌락이 뒤따르고 사랑스러운 음모가 엮이고 풀리는 젊고 쾌활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임은 속물적이지 않았다. 이 살롱에서 탄생한 ‘프레시오지테(17세기의 재치 있고 세련된 취향의 문학적 경향)’는 이곳을 자주 찾는 젊은 귀족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곳은 남성들이 주로 참석했던 다른 살롱과는 달리 여성들에게 자부심을 주는 몇 안 되는 살롱이었다. 이를 위해 랑부이예 부인은 재치와 매력으로 모임을 빛내줄 귀족 출신의 젊은 여성들을 모집했다. 몰리에르는 이 살롱의 멤버들을 조롱했지만, 랑부이예 호텔은 현대 프랑스 소설의 기원에 기념비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랑부이예 부인은 매우 친절하여 더욱 인기가 많았다. 반짝반짝 빛나고 웃음을 머금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녀를 사람들은 ‘아테나 니케’라고 불렀다. ‘아테나 니케’는 님프의 이름으로 귀중한 문학 작품과 바로크 음악에서 매우 인기가 있어 붙여진 것이었다. 그녀의 신봉자 중 한 명인 탈레망 드 레오는 사람들로부터 더 없는 사랑을 받는 그녀를 ‘최고의 멋쟁이’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살롱 언어의 규칙을 세운 랑부이예 부인

 

랑부이예 부인은 문인이 아니었다. “저는 시를 쓰지 않아요. 뮤즈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 궁정에서 노래 가사를 쓰는 데 참여했다. 그녀는 “여기 아테나 니케가 엄격함에서 자유로워졌어요. 운명의 가혹함은 항상 그녀를 쫓아다녔지요. 지나간 그녀의 모든 불행을 헤아려 보고 싶다면, 그녀의 삶의 순간들만 세어보면 될 거예요” 라고 자신의 삶을 가사로 은근슬쩍 드러냈다.

 

여러 언어를 잘 구사한 그녀는 살롱에서 손님들의 언어를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그리고는 거친 용어, 고풍스러운 표현, 지방의 지명 또는 모호한 전문 용어, 왕이나 교회에 대한 모욕, 무례한 욕설은 그녀의 살롱에서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녀는 살롱 미팅의 규칙을 만들었다. 이런 원칙 속에서 그녀는 문인들을 맞이해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이는 프랑스어의 발전과 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랑부이예 부인의 살롱은 영원하지 않았다. 1648년 프롱드의 난이 발발했고 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은 그녀의 살롱은 위험에 처하였다. 게다가 그녀의 딸 쥘리 당겐이 결혼하면서 살롱에서 멀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아들까지 사망하였다. 랑부이예 부인은 큰 슬픔에 빠졌고 결국 세속적인 일에서 손을 뗐다.

 

1665년 77세의 나이로 그녀는 세상을 등졌고 파란 방의 전설적인 랑부이예 호텔은 19세기 후반에 철거되고 말았다. 

 

[ 글=최인숙 논설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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