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는 불수도북(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이 한눈에 보인다. 그 산들의 능선 위로 흰 구름 떠 있는 맑은 가을의 어느 날, 망우리공원 입구의 느티나무 아래에 대학 동기인 사진가 창섭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망우리 사진을 찍고 싶다길래 안내해 주기로 했다.
위로 올라가면 좌우로 갈라진 길이 나온다. 왼쪽 길 바로 옆에 연보비(어록비)가 서 있다. 맨 위에 ‘유관순 열사(1902~1920 독립운동가)’, 그 아래에는 열사의 유언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가 새겨져 있다.
“아니, 유관순 열사가 여기 있다는 말인가?”
“그게 사연이 좀 길어. 안쪽으로 들어가지.”

데크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비석이 보인다. 앞면에 한문으로 ‘이태원 묘지 무연분묘 합장비’, 뒷면에는 ‘소화 11년(1936) 12월 경성부’라고 새겨져 있다. 뒤편에 합장묘가 있다.
“망우리묘지가 193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태원, 노고산(서강대 뒷산), 수철리(금호동), 미아리 등의 공동묘지가 없어지면서 기존 묘가 이장되었지. 노고산과 이태원의 무연고 묘가 망우리로 왔어. 예전에는 그 설명만 하고 지나쳤는데 경향신문 조운찬 기자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유관순 열사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공동묘지가 없어지면서 묘도 사라졌다고 하는데 혹시 이리로 오시지 않았을까요?’”
망우리와 유관순? 관련 자료를 찾았다. 옛날의 여러 자료는, 이태원 묘지가 없어지면서 유관순 열사의 묘가 ‘망실(亡失)’ 혹은 ‘실전(失傳)’되었다고 전했다. 잃어버려서 없어지거나, 전하여 오던 사실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독립운동가의 경우, 추모객이 모여들지 않게 일경은 비석을 세우지 못하게 했는데, 그렇게 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당시 무명의 여학생이었으니 추정에 그친다. 일단 비석을 세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 때 일경의 총칼에 부모를 잃고 오빠도 공주 시위 참가로 감옥에 갇혔으며, 더구나 천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고 다들 삶이 고달팠기에 열사의 묘를 돌볼 친지는 없었다.
열사의 고향인 천안에도 내려가 보았다. 생가를 거쳐 기념관을 둘러보고 위쪽의 추모각으로 올라가 유관순의 영정에 참배했다. 그 뒤편의 매봉산으로 올라가니 열사의 허묘가 나왔다. 끝내 묘를 찾지 못해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초혼묘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성된 날짜가 1989년 10월 12일로 되어 있는데, 그날은 형무소에서 시신을 인수한 날이다. 실제 순국일이 9월 28일이라는 사실은 뒤늦게 밝혀졌다.

1937년 6월 9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일제는 이태원을 주택지로 만들기 위해 1935년부터 이장을 추진하여 1936년 4월 8일까지 미아리와 망우리로 이장 완료했다. 유연고 묘는 4778기에 불과하고 나머지 2만 8000여 기는 무연고 묘로 판명되어 경성부 위생과에서는 그 전부를 망우리 공동묘지에 화장 및 합장했는데, 그 불쌍한 혼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9일 오후 2시부터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위령제를 거행한다고 전했다.
그러므로 무연고 묘가 화장되어 뼛가루가 망우리로 왔다면, 그 안에 열사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곳이 열사의 묘로 추정되며 이 합장비(묘)는 열사를 가장 가깝게 추모할 수 있는 상징물이라는 글을 2015년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개정판에 실었고, 2016년 서울시의 망우리공원 인문학길 조성 공사 때 묘역 안내판에도 이 내용을 적어 놓았다.
그 후로 이곳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18년 6월 6일 자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의 “유관순의 혼은 어디에 쉬고 있을까”라는 제목의 전면 기사가 기폭제가 되었다. 얼마 후 백석대 유관순 연구소장 박충순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망우리에 찾아와 합장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이제 찾아와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인터넷에 영상이 올라와 있어 알게 되었다.
곧이어 기념사업회는 이화여고 등 관련 단체와 함께 ‘유관순 열사 분묘합장표지비’를 9월 7일 합장묘 옆에 세웠다. 표지비 뒷면에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될 때 유 열사 묘를 포함한 연고자가 없는 2만 8000여 분묘를 화장하여 합장하고 위령비를 세웠다. 오늘 이곳에 3·1독립운동의 상징인 민족의 딸 유관순 열사 분묘합장표지비를 세운다”라고 적었다.

조운찬 기자도 2019년 9월 27일 자 경향신문에 “…무연고 묘로 분류됐던 유관순의 유해가 망우리로 이장됐을 것은 불문가지다. …순국 99주기를 맞아 용산 이태원(27일)에 이어 천안 유관순열사기념관(28일)에서 유관순 열사 추모제가 열린다. 내년부터는 망우리공원에서도 추모제가 열려야 할 것 같다”라고 썼다.
예전에는 망우리의 합장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아 이태원공동묘지가 있었던 용산구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에서 추도식이 열렸는데, 이 기사도 영향을 주었는지 2020년 열사의 순국 100주기 때부터 망우리에서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와 중랑구가 함께 추도식을 열었다. 그날 사업회 류정우 이사장은 “연구자들의 조사 결과에 따라 기념사업회는 망우리를 열사의 묘로 지정했고 해마다 오전에는 천안에서 오후 3시에는 망우리에서 추도식을 열기로 했다”고 말했다.
“순국 후 꼭 백 년 만에 열사의 안식처를 찾은 셈이지….”
“아, 그랬군. 간절한 추모의 마음들이 모여 마침내 찾아낸 장소로군. 근데 내가 지난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갔는데 유관순이 있던 여옥사 8호실에 들어가 봤어. 3·1운동 1년 후인 1920년 3월 1일 만세를 선창해 옆방의 수감자들 모두 따라 독립 만세를 외쳤던 그 방 말이야. 간수의 폭행으로 몸은 병들어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떴는데 죽기 전에 우러러봤을 쇠창살 밖의 하늘을 나도 한참 바라봤지.”
“그래? 그럼, 역사관 밑에 독립문과 서재필 동상이 서 있고 순국선열의 위패를 봉안한 독립관이 있지. 그 오른쪽에 유관순 열사의 동상(2021)이 서 있는 걸 봤나?”
“봤지. 사진도 찍었고.”
“그럼, 그 동상 오른쪽 안내판 글을 읽어봤어?”
“아니, 그건…”
“하하. 사진가라 이미지에만 관심 있구나.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적혀 있지. ‘열사의 유해는 … 무연고 분묘로 화장 후 현재 망우리공원에 합장되어 있다’라고. 그걸 보고 망우리로 발길을 잇는 사람이 늘어났을걸.”

그리고 망우리는 열사와 인연이 깊다. 무연분묘의 건너편 언덕에 '유관순' 노래를 지은 강소천의 묘가 있고, 뒤편 숲속에는 5인(혹은 6인이라고도 한다)의 결사대로 함께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했던 이화학당 동기 김분옥(이화여전 교수, 해방 후 초대 여경국장)의 묘가 있다. 그밖에 33인 한용운, 오세창, 박희도를 비롯해 3·1운동에 참가한 인물이 많고, 또 중요한 것은 함께 합장된 사람 중에는 3·1운동에 참가했던 서민도 적지 않을 터이니, 열사의 혼을 모시는 장소로 여기보다 적절한 곳은 없을 것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는데 2019년 3월 1일 대한민국장을 승격 추서했지. 활동 자체로 보면 훈격이 과한 면이 있지만, 독립지사로 대한민국장 서훈자에 여성이 중국인 송미령(장제스 부인)만 있고 우리 여성은 한 명도 없어. 그러니 독립운동에 헌신한 우리 여성 모두에게 드리는 훈장이라고 보면 되지.”
“그렇군. 공적 그 자체보다는 상징적인 부분이 크네. 어쨌건 가까운 곳에 인사 올릴 곳이 생겼으니 참 다행이야.”
“아, 참고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망우리 인물로 열사 외로 왕산 허위가 있지.”
“왕산 허위? 서대문형무소 첫 번째로 사형을 당했다는 분 말인가?”
“맞아. 저 아래 13도창의군탑이 서 있는데, 대표 인물이 왕산 허위야. 공원 한 바퀴 돌고 내려가면서 사진 찍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