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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 문학 살롱] 평등한 사회를 꿈꾼 네케르 부인의 살롱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18세기 프랑스의 문학 살롱은 여성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에서 작가, 철학자, 예술가, 정치인을 만나 자유롭게 교류하는 장소였다. 이 살롱 여주인들은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에 앞장서 프랑스 혁명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그녀들은 여성이 사적 영역에 머물면서 공적 문제와 담을 쌓고 살아가는 기존 방식을 거부했다. 여성은 집안일과 ‘가정의 영혼’이 돼야 한다는 관습과 제약에 굴복하지 않고 일부는 빛을 발하는 데 성공했다.

 

네케르 부인도 그중 한 명이었다. 루이 16세 왕의 재무장관이었던 남편의 완고함에도 그녀는 살롱을 열어 세상과 교류하며 새로운 사상을 전파해 나갔다. 그녀는 지식과 넘치는 자부심으로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자유, 자율, 평등, 그리고 창의성이라는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 투쟁한 살로니에르(살롱 여주인)였다.

 

1737년 프랑스 국경인 스위스 크라시에(Crassier)에서 태어난 네케르 부인의 본명은 쉬잔 퀴르쇼(Suzanne Curchod). 가난한 칼빈주의 목사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포괄적인 인문주의 교육을 받게 해 주었고 어머니는 아름다운 미모를 물려주었다.

 

성년이 된 퀴르쇼는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과 첫 연애를 시작했지만 곧 헤어졌다. 갑작스럽게 부모님을 여읜 그녀는 제네바에서 가정교사 일을 하다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스물일곱 살 때 그녀는 부유한 제네바 출신 금융가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를 만나 네덜란드 대사관 저택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부부는 곧 파리 3구 마레지구 미셸 르 콩트(Michel Le Comte) 거리에 정착했다.

 

1766년 네케르 부인은 파리 2구에 위치한 클레리(Cléry) 거리 르블랑 호텔(Hôtel Leblanc)로 이사했고 이때 살롱을 오픈했다. 매주 금요일 저녁 열린 그녀의 살롱은 한때 ‘철학자의 살롱(Salon des Philosophes)’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녀는 뮐루즈 거리 29번지와 쇼세 당탱 거리에서도 살롱을 운영했다. 이는 앙시앵 레짐의 마지막 대규모 살롱으로 매우 개방적이었고, 문학뿐 아니라 정치도 논의되는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수많은 유력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마르몽텔, 뷔퐁, 레이날 신부 등이 그들이었다. 곧이어 그림, 달랑베르, 홀바흐, 디드로 등 많은 작가들도 왔다. 디드로는 그녀를 ‘빈털터리 제네바 사람’이라고 묘사하면서 은행가 네케르로부터 아주 좋은 땅을 받은 사람이라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철학자들은 그녀의 살롱을 자주 드나들었지만, 결코 그들의 살롱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이 살롱에서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지나치게 대담한 사상 체계를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큰 키에 훤칠하고 균형 잡힌 네케르 부인은 무엇보다도 경직된 태도로 두드러졌다. 무신론 철학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우려하는 아버지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들에게 제 원칙을 보여주려고 해요. 저들은 제 집에서는 절대 그 주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녀 역시 칼빈주의자였던 것이다.

 

한 문건에 그녀의 살롱 내부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창문으로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넓고 환한 방에서, 아직 꽤 젊고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고 음색이 감미로운 한 여자 주위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긴장한 움직임이 그녀의 얼굴 전체를 흔들었고, 특히 침묵을 지킬 때 입술이 더욱 떨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름다웠다. 이 여자는 서너 명에게 일화를 들려주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매우 진지하게 듣고 있는 듯했다.”

 

장래 스타엘(Madame de Staël) 부인으로 이름을 떨칠 그녀의 딸 제르멘(Germaine)은 살롱에서 어머니를 도왔으며, 아주 어린 나이에 철학적 대화에 참여하는 등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네케르 부인은 훗날 딸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하고 싶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라고 말하며 겸손을 잃지 않았다.

 

네케르 부인의 살롱은 열린 독서회를 통해 문학과 사교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흄이 홀바흐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가 처음 낭독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 편지에는 스코틀랜드인이 루소에 ​​대한 자신의 모든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1770년 4월 17일, 디드로를 포함한 열일곱 명의 철학자가 당대 유명 조각가 장 바티스트 피갈에게 망명 중인 볼테르의 조각상을 의뢰한 곳도 이곳이었다. 네케르 부인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이 조각상을 피갈은 노철학자의 앙상한 나체 형상으로 표현했고 이 대담함에 많은 이가 불편해했다. 그러나 피갈은 자신의 구상대로 조각상을 6년 후 완성했고 다음과 같은 문구를 새겨 넣었다. “볼테르 경께, 문인들과 동포들, 동시대인들이 바칩니다.” 이 조각상은 공개되지 못한 채 한동안 피갈의 작업실 한 귀퉁이에 보관됐지만 지금은 루브르에 당당히 전시돼 있다.

 

 

1776년 네케르가 마침내 정부에 입성했을 때, 네케르 부인의 살롱은 정치적인 면이 더욱 강해졌다. 여성 지위에 대한 네케르 장관의 고루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778년 병든 아이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하고 호스피스 설립에 대한 회고록과 이혼에 대한 성찰을 출판했다. 그녀는 그랑드 담(Grande Dame: 귀부인)으로 불리고 파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됐다.

 

파리 오텔디외(Hôtel-Dieu) 병원의 열악한 환경에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직접 병원을 지어 손수 10년간 운영했던 것이다. 그녀의 자선병원(Hospice de Charité)은 위생에 특히 중점을 두어 각 환자에게 개인 침대를 제공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오늘날 이 병원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네케르-앙팡 말라드 병원이라 불린다. 그녀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의 딸 제르멘을 교육시켜 훗날 프랑스 사회 개혁에 크게 앞장서는 여성으로 만들었다.

 

혁명 전야 그녀의 살롱에는 옛 단골손님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손님들이 등장했다. 네케르 부인은 미래의 스탈 부인이 될 딸에게 이 살롱을 내주었다. 혁명이 시작되자 루이 16세와 남편의 내각은 몰락했다. 1790년 그녀는 남편과 함께 스위스로 돌아가 제네바의 레만 호숫가에 있는 자신의 성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그녀는 혁명군에게 생매장당할 거라는 섬뜩한 생각으로 정신 질환에 시달리다 5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고 증류주가 담긴 통에 넣어 보존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관의 모양을 포함한 세세한 부분까지 그녀가 직접 계획한 장례식은 그녀의 마지막 위대한 작품으로 남았다. 네케르 부인은 지금 스위스 코페 마을 코페 성(château de Coppet) 안에 있는 네케르 무덤에서 남편과 딸의 곁을 지키며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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