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신통함을 깨닫지 못하고 무심히 대하는 것 중에, ‘오감(五感)의 작용’이 있다. 인간은 ‘듣다’, ‘보다’, ‘냄새 맡다’, ‘맛보다’, ‘만지다’ 등 오감을 통해서 바깥 세계의 외물과 교감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앎을 쌓아간다. 개인의 앎도 그러하고 인류의 지혜도 이를 바탕으로 쌓아 올린 것이다. 이렇듯 ‘느껴서 알고 깨닫는’, 인간의 지각(知覺) 작용은 오묘하다. 오감의 지각 작용은 인간이 자신을 존재론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의미 있게 다가온다.
가령 신화 이야기에 등장함 직한 가정을 적용하여 이런 물음을 던져보자. 금방 오감에 대한 존재론적 자각이 온다. 오감 중에 어느 하나에 특별히 초능력을 부여받을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감각이 강화되기를 청하겠는가? 반대로 당신이 어떤 징벌로 이 중 어느 하나를 소멸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느 감각을 포기하겠는가? 이런 물음에 내 답을 구해 보는 일은, 나의 존재됨에 대해서, 그리고 내 존재됨의 조건에 대해서, 상당히 실존적이고 현상학적인 깨달음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순정한 상상력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청각’의 시·공간을 중시한다. 독일의 예술성 드라마가 라디오 드라마에서 발원하여 현대적 진화를 보여 주는 데서 듣기의 시공에서 생성되는 상상력 파워를 엿볼 수 있다. 동일한 내러티브를 창작 소재로 해서 생겨난 음악과 미술과 연극 중에서 감상자가 상상력 면에서 그 진폭을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비교적 큰 부문이 음악이라는 데 동의하는 분들이 많다. 청각은 수용자의 내면에서 그것을 시각적으로 번역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겪는다. 이 또한 청각 인지가 갖는 잠재력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이를 머릿속에서 다시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정동(情動, affection)의 감수성도 청지각(聽知覺)의 깊고 그윽함을 응시하게 한다.
대상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고 구체적으로 인지하려는 사람은 ‘시지각(視知覺)’을 중시한다. 시지각은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자연의 실상을 포착하는 첨병이었다. 시지각은 인류의 자연 탐구를 도우며, 인간의 앎을 개발하였다. 시지각의 위대함은 인류가 문자를 발명하면서 ‘독서의 영역’을 창출한 데서 눈부셨다. 문명사 차원에서 보면 ‘시지각을 통한 인지 혁명’, 즉 교육과 학습의 혁명을 불러온 것이다. 문자는 저 스스로 태어날 수 없다. 인간의 시지각 생태를 전제로 생겨난다. 이 점을 우리는 놓친다. 오감은 서로 합하여 공동의 선을 만들어 가는 통합의 기제이다. 우선은 청각과 시각이 서로 도움으로써 인간의 학습과 사고와 인지를 높게 끌어 올린다.
‘듣보다’라는 말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말로,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며 알아보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혼처를 듣보다”라고 할 때 쓴다. 듣기와 보기가 서로 도와서, 알아보고 살필 때 성과를 얻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 ‘듣보다’라는 말을 아는 이가 드물다. 그 대신 속되게 쓰이는 말 ‘듣보잡’을 아는 이는 많다.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라는 뜻의 말이다. 이 말을 누군가 쓴다면, 말하는 이나 그 말을 듣는 이나 교양 없음의 표정을 감출 수 없다. 청각과 시각이 합하여 선을 이루는 모습은 간 곳이 없다. 물론 인간 오감에 대한 경외도 없다. 인간 가치를 짓밟는 언어가 횡행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