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가 고장 났습니다. 하필이면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져 버린 날이었어요. 그것도 저녁 무렵이었지요. 대리점에 전화했지만, 일과가 끝난 시간이라 보일러 기사는 다음날에야 방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난감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집안은 점점 더 싸늘해졌어요. 추운 겨울이라지만 실내에서조차 몸을 움츠린 채 서성이는데,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러고는 이토록 사소한 일에 반응하는 나를 보며 마음이 또 가라앉아버렸지요. 잠깐의 불편도 참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아찔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쌓아두었습니다. 씻는 일이 가장 큰 문제로 다가왔어요. 차가운 물로 이를 닦고, 고양이 세수를 했어요. 전기포트에라도 물을 끓이면 될 것을,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따뜻한 물이 그리웠습니다. 이미 경험한 것, 오래 누려서 익숙한 것이 끊겨버리자, 그리움은 더 선명해졌습니다. 그 틈으로 묻혀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몸 하나가 다 들어가는 빨간 고무통. 우리는 속옷만 입고 엄마의 호명을 기다리며 오돌오돌 떨고 있었어요. 차례를 기다리며 먼저 들어가기 싫다고 뻗대다가 다 씻고 나온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했지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고무통 속은 따뜻했습니다. 살이 벗겨지도록 벅벅 몸을 밀어대는 엄마의 손길만 아니었다면, 그 속에서 나오기 싫을 만큼 좋았죠. 그리고 겨울 아침에는 이불 속에서 나오기 싫어 늦장을 부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들통에 데운 물은 어느새 동이 나버렸어요. 게으름을 피운 대가는 차가운 물로 몸을 씻고 학교에 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불편한 줄 몰랐습니다.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보일러 기사가 방문하겠다고 약속한 아침은 오지 않을 시간처럼 길게 느껴집니다. 카프카의 『성』에서 측량기사 K가 끝내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천천히 마음을 다독였어요. 그러자 안락함에 길들어진 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룻밤의 불편을 어떤 불행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 말이에요. 하루가 아닌 매일의 일상을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요. 새해가 시작되고 세운 계획들과 이루고 싶은 꿈의 목록에는 나만 있었어요. 다른 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얼마나 간절하게 품어 보았나, 생각했습니다. 보일러 기사는 약속한 시각보다 더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보일러는 결국 수리가 아닌 교체를 해야 했지요. 그것도 괜찮았어요. 드디어 집안에 온기가 돌고 수도꼭지를 돌리자 따뜻한 물이 콸콸 쏟아졌습니다. 마치 새로운 샘을 판 것 같았어요. 하룻밤 사이에 꼬질꼬질해진 몸을 씻었습니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깨끗함을 유지하고, 품위를 지닐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매일 당연하게 누려온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나서야, 우리가 얼마나 편리한 구조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마음 역시 곧 잊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따뜻한 물을 쉽게 쓸 수 없는 집들을 떠올렸습니다.
보일러 온수의 온도를 이전보다 낮게 설정했습니다. 너무 뜨겁지 않게요. 차가움과 따뜻함 속에서 비로소 잠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