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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기의 말에게 말걸기] 듣는다는 것

 

언어 수행 차원에서 인격 발달의 성숙을 보이는 인간을 말하라면, ‘듣는 인간’이 여기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듣는 인간’에게서 ‘긍정의 철학’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 긍정성은 개인의 성숙에 그치지 않는다. 긍정의 지향이 관계들의 선순환과 소통을 대화적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성숙이 돋보인다. 일상 현실 속 사람들의 구체적 언어 수행에서 인간적 성숙을 감득하게 하는 장면도 ‘말하는 인간’보다는 ‘듣는 인간’에게서 경험할 때가 많다.

 

‘듣는 인간’은 불가피하게 실천적이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말하기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듣기의 현재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듣는 인간’은 ‘잘 듣는(들으려는) 인간’이다. ‘잘 듣는 인간’에서 ‘잘’은 기능적 숙련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각의 뛰어남과 정의(情意 Affective)의 원만 풍성함과 윤리의 아름다움을 모두 실천해 내는 수준을 뜻한다. ‘잘 듣는 인간’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의 자질을 자신의 듣는 역량 수준으로 고르게 녹여 넣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듣는다’의 함의는 참으로 깊고 두텁다. 논어의 이인(里仁)편에는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는 구절이 나온다.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뜻이다.여기서도 ‘듣다(聞)’를 두고 수많은 주석과 해석이 존재한다. 자전이 밝히는 ‘聞(듣다)’의 뜻만 해도, 가르침을 받다, 알다, 널리 견문하다, 들려주다, 삼가 말하다, 냄새 맡다, 방문하다, 서신을 보내다 등의 뜻이 있다. ‘듣다(聞)’의 의미는 정말 간단치 않다.

 

청문회(聽聞會,Hearing)라는 듣기 현상은 어떠한가. ‘청(聽)도 듣는 것이고, ’문(聞)도 듣는 것이니, 오로지 듣는 모임을 뜻하는 이 말에서 우리는 혼돈스러운 듣기 현상을 본다. 정치적 이해와 전략을 거칠게 구사하며 듣기를 운영하는 청문회, 듣기라고 해 놓고 듣기보다는 정파 간 싸움의 말하기로 일관하는 청문회는 이제는 익숙하다. 증인을 닦달하는 방식으로 증인에게 들으려고 한다. 이 또한 모두 듣기의 현상이다. 듣기가 제도로 운용되는 장면에서 진실로 ‘듣는 능력’은 무엇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없다.

 

듣는 행위는 생활에서 항용 영위되는 일상의 언어 행위이지만, 듣는 행위만큼 일상을 뛰어넘어 신령한 영역에 가닿는 것도 드물다. 고대 사회에서 있었던 신탁(神託)이라는 의식은 인류의 보편이라 할 수 있는데, 신탁이란 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제관이 신전에 가서 인간의 문제를 신에게 올리고 신의 대답을 듣는 것이 신탁이다. 형식과 유형은 달라도 인류가 신을 듣는 방식은 비슷했다. 어떤 초월적 존재를 인간이 느끼고 영적으로 교감하는 방식은 대체로 ‘듣는다’에 의탁하는 경우가 많다. 신을 듣는다는 의식에 기대어서 신의 현존을 공동체가 받아들이는 모습이라 하겠다. 말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에도 이런 초월적 듣기가 알게 모르게 관여하는 것 아닐까.

 

듣는 행위와 듣는 현상을 두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은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해졌다. 디지털 미디어가 온갖 전언을 우리들 귀에 들이대는 이 시대는 더더욱 그러하다. ‘잘 듣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찾아보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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