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취재 때문에 나태주 시인을 만났는데 ‘어떤 존재가 시인이 되는가. 시 없이 무탈하게 사는 삶, 지옥을 살더라도 시 쓰는 삶 중 택하라면 기꺼이 후 선택을 하는 자’라는 말을 들었다. ‘좋은 시를 쓰려면 지옥을 살아봐야 한다’는 말로도 들렸다. 실제 문인, 예술가 중 오체투지하듯 산 이들 가운데 ‘문학과 예술의 소재, 성찰이 삶의 지옥에서 빚진 게 많아 통과의례라 생각한다’ 라거나 ‘다시 태어나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같은 길을 가겠다’고 말하는 예술가를 많이 만났다. 그들처럼 예술의 피와 끼가 없는 나는 ‘도대체 예술이 무엇이기에 지옥마저 껴안는가’라는 의문을 더하곤 했다. 스탄 게츠(Stan Gets 1927-1991)를 소개하려고 꺼낸 이야기다. 브라질 보사노바 음악을 이야기할 때 작곡자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 1927-1994)과 함께 세트로 나오는 미국의 색소폰 연주자. 그의 음악을 처음 들은 것은 20여 년 전, 친구 작업실에서였다. FM 라디오에서 재즈가 흐르고 있었는데 색소폰 소리 하나가 훅 들어왔다. 들으면 담박 아는 명곡 서머타임(Summertime). 미국 조지 거슈인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
비현실적이다, 미국 빌보드에서 올해 최장기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방탄소년단의 버터(Butter) 이야기다. 100년 가까운 빌보드 역사는 대개 영미팝음악의 잔치였다. 빌보드 신기록을 향해 달리고 있는 녹지 않는 ‘버터’의 인기에 우리뿐 아니라 세계도 놀라고 있다. 50년 전인 1965년, 빌보드에 고개를 내민 월드뮤직 한 곡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앨범차트 2위, 싱글차트 5위까지 오른 브라질 노래 ‘걸 프롬 이파네마(Girl From Ipanema)’. 브라질의 걸출한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io Carlos Jobim, 1927-1994)은 브라질 전통 음악 삼바에 모던재즈를 섞은 이 노래로 보사노바(Bossa Nova)라는 새로운 음악장르를 탄생시켰다. 과거 포르투갈 식민지였기에 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 보사노바는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경향’ 정도의 의미다. ‘걸 프롬 이파네마’는 새로운 경향 정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식지 않는 보사노바 열풍을 일으킨 월드뮤직 명곡이다. 빌보드 히트와 함께 노래가 담긴 앨범을 미국에서만 50만 장 이상 팔아치우고 같은 해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이파네마는
‘도둑을 만날 수도 있고 납치될 수도 있어요’ 20여 년 전, 배낭여행 중 들른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앞. 궁전 건너 보이는 하얀 동굴같은 집들이 궁금해 묻는 내게 현지인은 집시마을 사크라몬떼라며 위험을 경고했다. 호기심이 두려움에 앞서 결국 마을로 들어갔다. 반쯤 문 연 집이 보여 노크했더니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나온다. 한 세 평 될까 싶은 흙바닥에 예닐곱 살 여자아이들 서너 명이 엉켜 놀고 있었다. 누더기 같은 옷차림도 반 벗은 채였다. 인기척에 돌아보는 아이들 얼굴에 잠깐 숨이 멎었다. 치렁치렁 긴 검은 머리, 커다랗고 검은 눈, 붉은 입술이 뿜어내는 매혹이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별점과 도둑질을 일삼고 바이올린 하나로 집단가무를 즐기며 유랑하던 집시의 피가 만들어낸 것일까. 아이들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 것은 여행에서 돌아와 들은 한 곡의 음악 때문이었다. 스페인의 플라멩코 피아니스트인 다비드 페냐 도란테스(David Pena Dorantes)의 앨범 속 오로브로이(Orobroy). 아이들을 만났을 때처럼 잠깐 숨이 멎었다. 아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처럼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해가는 피아노 음이 판타지의 세계로 이끄는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아루바, 앤티카 바부다, 안도라, 에스와 티니, 에리트리아, 기니 비 시우, 상투메프린시페, 세이셀, 차드, 바베이도스.... 국가명들이다. 지구 상 어느 곳, 어떤 나라인지 아는가? 지난 23일, 도쿄올림픽 개막식 때 입장한 세계 205개 나라 선수단을 보며 아직도 낯선 국명들이 여럿 있구나 생각했다. ‘카보베르데’가 나온다. 월드뮤직 강사가 되기 전에는 몰랐던 이름. 가수 세자리아 에보라(Cesaria Evora 1941-2011) 때문에 알게 된 이름. 말하자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모르거나 관심이 없었는데 BTS 때문에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비슷한 예다. 여기까지 읽고 바로 유튜브 영상 등을 통해 ‘세자리아 에보라’를 찾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거구의 늙은 흑인 모습이 뜰 것이고 사시 눈에 고생 찌든 느낌의 얼굴을 볼 것이다. 반전은 목소리다. 어두운데 무겁지 않다. 밝다. 이런 컬러의 목소리가 있었던가. 한 곡 더..... 하다가 모든 노래를 찾아 듣게 될 것이고 베사메 무쵸(Besame Mucho)에 이르면 ‘대체 어떤 삶이 이런 목소리를 만들어냈을까?’라는 궁금증으로 폭풍 검색에 들어갈 것이
음악의 치유효과를 수없이 경험했다. 노라 존스의 목소리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2000년대 초반, 어느 날의 이야기. 가을밤, 예고 없는 비에 젖은 생쥐꼴로 귀가하던 중 아파트 밖 자전거를 들이다 발목을 삐었다. 절룩대며 집안에 들어섰는데 열어놓은 베란다 사이로 들이친 비에 책들이 흠뻑 젖어있었다. 으악, 비명이 올라오는데 울리는 전화벨. 반가울 리 없다. 더군다나 ‘죽이는 목소리가 있어 들려주려고’라는 말에 짜증이 더해졌다. 지금 음악 따위 들을 분위기 아니라고! 냅다 지르려는 소리를 전화선을 타고 넘어온 목소리가 덮는다. 수화기를 든 채 커피포트 스위치를 올렸다. 커피 향이 번지는 창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 구질구질한 비에 젖은 시가가 천천히 영화 속 풍경으로 바뀐다. 친구의 표현은 적확했다. 죽이는 ‘음악’이 아니라 ‘목. 소. 리’였다. 대체 불가의 목소리. 가을, 밤, 비, 커피와 너무나 어울리는 목소리. 노라 존스. 컴 어웨이 위드 미(Come Away With Me) 지금이야 세계적인 재즈 가수지만 그때는 첫 앨범을 냈을 때니 신예였다. 앨범이 발표되자마자 400만 장 팔려 대히트를 기록했고 그다음 해 200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음반, 올
작업실에 놀러 온 음악광 친구가 유튜브 뮤직으로 이것저것 찾아 듣는다. 귀에 익으면서 낯선 선율이 심장을 훑고 지나간다. 무슨 음악인가 물었다. “시타르” “라비 샹카?” “아니 딸. 아누쉬카 샹카. 시타르 별로라면서?” “딸 건 좋네 ” 월드뮤직이 낯선 이에게 선문답으로 들리겠다. 정리하자면 친구가 틀었던 음악은 아누쉬카 샹카(Anoushka Shanker)의 시타르(인도전통악기) 연주인데 그의 아버지 라비 샹카(Ravi Shanker 1920-2012)는 세계적인 시타르 연주자다. 대가인 라비 샹카의 시타르 연주에 관심 보이지 않았던 내가 딸의 시타르 연주에 반응하자 의아했던 것이다. 친구가 음악광다운 한 마디를 보탠다. “하긴 월드뮤직은 전통, 민속만 고집하면 안 돼. 섞어야지” 시타르를 처음 만난 건 20년 전, 인도 배낭여행할 때다. 북서부 타르 사막 도시인 자이살메르까지 흘러들어 갔는데 초여름 비수기라 동행 여행자가 나 말고 서너 명뿐이었다. 가이드와 여행자들이 쉴 곳을 찾아 가는데 사막 풍경을 더 보겠다고 혼자 남았다. 사막은 처음이었다. 건물과 사람과 소음이 일상이던 도시인에게 ‘아무것도 없는 곳’이 주는 충격은 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밥 말리 하니 카오산 로드가 떠오른다. 90년대 초반, 배낭여행하던 중에 경유지였던 태국 방콕 공항에서 일부러 빠져나가 찾았던 거리. 300미터 남짓 되는, 길 양쪽에 음식점과 숙소, 기념품점, 술집 등이 어지러운 간판과 함께 즐비한데 그 사이를 오가는 이들은 모두가 여행자다. 생경한 풍경이었다. 공기도 달랐다. 술 없이도 달뜨고 취하게 했다. 뜬금없이 노래가 주술을 걸었나 생각했다. 생각하니 지금도 귀가 뜨겁다. 상점 곳곳에서 나오던 노래. 밥 말리의 노래를, 그것도 같은 노래를, 그것도 하루 종일 틀어대는 곳이 많았다. 노 우먼 노 크라이(No Woman, No Cry). 사랑 노래라고 생각했다. 여름이었고 청춘이었고 여행자였으니까. 한참 후에 알게 됐다. ‘노 우먼 노 크라이’는 밥 말리가 인생의 겨울을 사는 이들을 위로하는 노래였다. 서른여섯에 요절한 밥 말리는 짧은 생애, 노래하는 전사로 살았다. 인권과 자유, 평등을 위해 싸웠다. 그가 살았던 시대, 그를 낳은 환경이 그를 투사로 만들었다. 밥 말리의 고국 자메이카. 북미 카리브해 쿠바 밑에 위치한 이 섬나라는 1494년 콜럼버스의 발길이 닿은 후 쑥대밭이 되었다. 스페인 통치에서 영국 통치로 넘어
어려서부터 ‘공부 잘하는 부잣집 애’에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열 살 넘으면서 헤세의 싯다르타, 앙드레 지드의 돌아온 탕아(아! 내 인생 단편) 속 주인공에 빠져 밤을 태우던 조숙한 문학소녀는 ‘그림자 없는 인간은 깊이도 없을 것’이라 단정했다. 스무 살 넘어서도 어둠에 집착, 연애도 결손가정 출신이나 감옥 들락거리는 운동권 사내들과 했고 단골 카페도 대로변 햇빛 쏟아지는 공간이 아닌 곰팡이 냄새 피는 지하공간이었다. 청춘의 끝자락에 월드뮤직을 만나 음악으로 세계 일주를 하던 중에도 미국음악은 관심 밖이었다. 원주민 땅 따먹고 세워진 이백여 년 미국사가 낳은 음악들은 ‘오랜 역사 속 민중의 희노애락에 오욕이 발효돼 나온 월드뮤직의 본령’과 멀 것이라 예단했다. 중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즐기던 팝송 가사들이 온통 러브에 울고 웃는 내용이었던 터라 유치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 대학을 다녀 반미감정도 있었다. 핑크 마티니를 늦게 만난 이유들이다. 핑크 마티니 음악이 좋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 건 2000년 넘어서였는데 미국음악이라 패스. 그룹 이름이 핑크 마티니가 뭐야? 웬 칵테일 이름? 아마 신시사이저 웽웽 울리고 드럼 때려 부수는 정신없는 팝그룹이겠지..
20여년 전, KBS TV 교양프로그램 작가로 일하던 때 동네 문화회관의 부부 사교댄스 프로그램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뒷말이 많았다. 저녁 6시대에 퇴폐조장장면을 내보냈다는 이유다. 2000년 넘어서도 ‘월드뮤직 인문학’ 이름의 대기업 강의를 맡았는데 강의 직전 담당자가 찾아와서 ‘탱고’ 부분은 빼면 안되겠는가고 절박하게 물었다.(나의 대답은 ‘강사를 빼면 안되겠는가?’ 였다) 그런 이력이 있으니 2014년 피겨스타 김연아의 소치 동계올림픽 때 배경음악으로 탱고가 흐르고, 경기 후 언론이 찬사로 도배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만감이 교차’ 했다. 배경음악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는 탱고가 저질 춤곡이 아닌 ‘클래식 반열에 오른 음악’ 임을 대중에게 널리 알려주었다. 이 음악이 세계인의 가슴을 흔든 일이 있었으니 2002년 네덜란드 왕세자 결혼식 때였다. ‘가슴을 흔든’ 데는 음악 자체의 매혹도 있겠지만 정치가 얽혀들어 비극으로 끝날 뻔했던 사랑 이야기 때문이기도 했다. 1999년 스페인 세비야의 한 파티에서 만나 첫눈에 서로 반해 결혼을 꿈꾸게 된 네덜란드 왕세자 빌럼 알렉산더르와 아르헨티나 출신의 막시마 소레기에타.
전 세계 맥도날드 직원들이 BTS의 한글초성 ‘ㅂㅌㅅㄴㄷ’을 새긴 티셔츠를 입었다. BTS와 맥도날드의 협약내용이란다. 코로나 와중에도 여전히 끓고 있는 BTS의 위상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노래와 춤에 재능 보였을 BTS의 어린 시절, 부모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본다. ‘일단 대학부터 나와야 사람 대접 받는다. 대중음악은 성공하기 힘드니까 정히 음악하고 싶으면 클래식을 전공해라. 집을 팔아서라도 유학 보내줄게’ 얼마나 다행인가. BTS가 서양클래식을 전공하지 않고 대학입시에 매진하지 않고 세상 어른들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것이! 월드뮤직계에도 ‘엄마 말 안 들어’ 성공한 스토리가 넘쳐난다. 세상 눈치 안 보고 제 안의 질문과 답만으로 길을 찾고 행복한 음악가가 된 극적 드라마 말이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가 아르헨티나의 탱고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a 1921-1992). 생전의 피아졸라는 자신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탱고와 심포니 둘을 오갔던 존재’라고 한적이 있다. 술집 음악이었던 탱고를 클래식 반열로 끌어올리기까지 한 음악가의 전쟁사(戰爭史)를 드러낸 말이지만 유럽 유학 시기의 지독했던 혼란과 갈등 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