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가장 영리한 아저씨’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저 없이 선택하게 할 작품이지만 어떤 사람들, 특히 류승완을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소 실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매우 대중적이고 상업영화답지만(티켓값이 전혀 아깝지 않지만) 류승완의 작가적 성향은 다소 숨이 죽은 느낌의 작품이다. 근데 그건 감독 스스로 다소 의도한 것으로 보이는 면이 있다. 류승완도 때론 쉬어가고 싶은 심정일 테고 영화를 즐기면서 찍고 싶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밀수’는 최동훈이 만든 ‘도둑들’의 페미니즘 판 작품이다. 페미니즘 케이퍼 무비(Caper Movie) 혹은 여성들의 랫 팩(Rat Pack) 무비인 셈이다. 한 무리의 강도들이 범죄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전 과정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라는 얘기인데 그 주인공들이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지금껏 이런 유의 ‘강탈 영화’는 대체적으로 남자들이 주인공이었다. 가깝게는 ‘오션스 11’이니 ‘뱅크 잡’이니 하는 것들, 멀게는 숀 코네리 주연의 1979년작 ‘대 열차 강도’같은 것, 더 멀게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딘 마틴이 주연을 맡았던 작품으로 ‘오션스 11’이 리메이크했던 1960년작
영화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라 비닐하우스에서 살아가는 한 여자의 어둡고 참혹한 이야기다.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은데 생각해 보면 정말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안다. 한 마디로 영화가 지닌 ‘비현실적 현실성’의 속성을 보여 준다. 그냥 영화에 불과한 얘기 같지만 알고 보면 이게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거나 최소한 그 같은 현실의 일을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현실성=리얼리티’가 배가된다. 이런 느낌의 반대가 ‘현실적 비현실성’인데 영화가 너무 현실 같아서 마치 다큐를 보듯 실제 같은 느낌을 받지만 그래도 결국 꾸며진 이야기라는 것이다. 많은 판타지 영화들, SF 영화들이 그렇다. 결국 영화에 불과하다는 소격효과(疏隔效果 :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서 중간중간 작품을 객관화, 대상화해서 보게 되는 과정)로 관객들은 더 큰 안심을 느끼게 된다. 지구가 재앙으로 멸망하는 과정 같은 것을 영화로 본 후의 느낌 같은 것이다. 이 역시 영화가 주는 리얼한 느낌을 역설적으로 증폭시키는 효과가 된다. 사람들은 언젠가 우리들의 운명이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영화 ‘비닐하우스’는 그냥 영화인 척 사실은 영화가 아니라
미디어의 확장성이 다소 떨어져서 그렇긴 하지만 글로벌 OTT 중 하나인 애플TV +는 종종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내놓는다. ‘파친코’가 대표적인데 요즘은 ‘사일로(SILO)’란 작품이 그렇다. 한국어 제목은 ‘지하창고 사일로의 비밀’이다. 제목을 이렇게 붙인 데는 사일로란 단어가 미국의 대평야 지대를 지나다 중간중간에 볼 수 있는 곡물형 창고의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곡식과 목초를 쌓아 두는 굴뚝 모양의 창고를 뜻한다. 10부작 드라마인 이 작품에서 사일로는 144층의 수직형 지하 건물로 나온다. 바깥 세상은 차단됐으며 140년간 사람들은 외부로 나간 적이 없다. 외부세계는 극도의 대기오염으로 나가자마자 사망하게 된다는 것이고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사례를 목격한다. 사일로 안 시민들은 역사 이전과 역사 이후 혹은 반란 이전과 반란 이후로 구분하고 살도록 주입됐다. 사람들은 반란 세력이 책과 정보를 모두 불태워 사일로의 역사는 남아 있지 않다고 배우며 살아 간다. 모든 것에 통제 아닌 통제가 이루어지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임신 허가제라는 것이다. 사일로 안의 모든 여성은 피임기구를 시술받고 임신 허가가 나오면 이 기구를 제거할 수 있게 된다. 임신도 허가제이지
토니 길로이, 아론 소킨, 폴 해기스 등과 함께 현존하는 할리우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소리를 듣는 크리스토퍼 맥쿼리의 ‘미션 임파서블 7 : 데드 레코닝’은 결국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 ‘미션’ 시리즈에서 맥쿼리는 자신이 갖고 있던 평생의 숙제 같은 얘기를 몽땅 욱여넣고 집대성한다. 일단 이야기 설정 자체가 그렇다. 뭐랄까. 상대를 너무 크게 잡았다. 인류의 미래를 바로 지금이라도 절대적으로 위협하는 존재가 주인공 에단 헌트(톰 크루즈)의 상대이다. 그 존재는 사실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진화하는, 일종의 AI 기술이다. ‘엔티티’로 불린다. 겉으로 보기에 에단의 상대는, 그 기술을 차지해 세계 권력을 쥐려는 악당 가브리엘(에사이 모레일스) 같지만 그것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도 어쩌면 그냥 ‘가브리엘’ 곧, ‘4명의 천사장 중 한 명일 뿐이다’. 에단의 적은 가브리엘 같기도 하고 CIA 산하의 비밀 조직이자 자신이 소속돼 있는 IMF(Impossible Mission Force)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 수장인 키트리지 국장(헨리 체르니)이 적으로 배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 에단의 적은 그냥
모든 것은 다 ‘그놈의’ 토드 때문이다. 토드는 강아지다. 유기견이다. 이런 강아지가 흔히 그렇듯 분리불안증이 심하다. 그래서 자주 짖는다. 동네 주민들이 난리다. 집 주인도 결국 방을 빼라고 한다. 견주인 존 체스터와 아내 몰리는 이사를 갈 바에야 아주 색다른 인생의 전환점을 찾으려 한다. 바로 토드가 뛰어놀 수 있고 마음껏 짖을 수 있는, 그리고 온갖 동물과 식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다 함께 할 수 있는 농장을 만든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작은 농장’은 이처럼 존&몰리 부부의 불가능하고 무모한 농장 운영 도전기를 그린 내용의 작품이다. 존 체스터는 다큐멘터리 촬영감독이다. 주로 동물 다큐를 찍어 왔다. 몰리 체스터는 건강식 요리 전문가이다. 이 모든 일은 강아지 토드에게서 비롯됐지만 아내 몰리의 입버릇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건강한 요리를 위해서는 채소는 직접 재배한 것을 써야 한다고 말해 왔고 그래서 그녀는 늘 방울토마토부터 바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재배할 꿈에 대해 얘기해 왔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다큐의 제목은 몇 가지 점에서 의도적인 거짓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일단 ‘작은’ 농장이 아니다. 존&몰
미국 뉴욕 출신의 감독 아리 에스터의 영화들(‘유전’, ‘미드 소마’ 등)은 난독증의 필사본이다. 그의 최신작으로 국내에서 막 개봉될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절대 해독 불가 아리 에스터 월드’의 최고봉이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 아리 에스터도 놀랍지만 이런 영화에 돈을 대고 문을 열어 주는 투자자와 극장들도 놀랍다. 이건 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 들인 돈만큼을 수익으로 환원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관객들을 영화 인식의 인내로 내몬다. 미지(未知)와 불가지(不可知)가 마구 뒤섞여 있는 영화. 노력하면 결국은 알 수 있는, 아직 모르고 있을 뿐(未知)이지만 동시에 그래도 결국엔 알 수 없는(不可知) 얘기가 혼재돼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인공인 보(호아퀸 피닉스)가 어렸을 때부터 싱글 맘인 모나(패티 루폰)로부터 정서적 학대에 시달려 왔고 그것이야말로 성인이 돼서도 그의 편집증의 궁극적 원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끊임없이 살모(殺母)라는 존속 살해의 강박증을 가지고 있음은 느낄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 정신병리학적인 것이라는 점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보가 한 번
지난 2월 국내 극장 개봉 당시 41만 명이라는 비교적 괜찮은 흥행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세간의 화제를 얻는 데는 실패했던 작품 ‘서치 2’는 영화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다. ‘서치 2’는 매우 영리하고 똑똑한 영화이다. 어느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작 ‘서치 1’처럼 ‘서치 2’도 누군 가를 찾는 얘기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만 연작의 특징을 가질 뿐 두 영화는 연관성이 없다. 1편의 원제는 그대로 Searching(수색)이고 2편은 Missing(실종)이다. 이건 내용 면에서 큰 변별력을 보이는 대목이다. 서사의 구성 면에서 2가 1보다 진화했다. 영화가 훨씬 풍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두고 사람들이 별다르게 뜨거운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1편과 달리)은 영화를 따라가는 ‘정서’가(‘기술’이 아니라) 점점 더 MZ 세대 중심이기 때문이다. 영화 ‘서치 2’는 디지털 세계의 기술적 다양함을 넘어선, 믿을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구사할 줄도 모르는 올드 세대 관객들에겐 그 서사(敍事), 곧 줄거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영화가 중간중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
정치적 무관심이 영화적 무관심을 부른다. 이제 아무도 영화’판’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무리 코로나19 탓이었다 해도 이제 극장가를 두고 수직계열화 문제니 스크린독과점 문제니 등등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특히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그렇다. ‘범죄도시3’가 개봉 초기 전국 2352개 스크린에 걸린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전국 스크린 수는 2700개 아래 수준이다. 그동안 돈을 못벌었으니, 뭣보다 극장가가 망하게 생겼으니, 한 영화만이라도 돈을 좀 번다는데 뭐 그리 잘못이겠느냐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적어도 생각을 해야 한다. ‘범죄3’가 그렇게 시장을 싹쓸이 하고 있을 때 지난 해 베를린영화제와 런던비평가협회에서 상을 탔으며 올해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작이었던 ‘말없는 소녀’는 전국 스크린 45개에 불과한 것에 대해 생각을 좀 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아무 것도 기대할 게 없는 정권이고 세상이라고 한다. 영화 따위 어떻게 된다 한들 이제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이다. 심지어 정부가 영화진흥위원회를 지목해 혈세를 낭비했다며 곧 감사에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주의 감독인 스웨덴의 루벤 외스틀룬드가 칸에서 두번째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 ‘슬픔의 삼각형’은 제목이 주는 느낌처럼 슬프거나 혹은 그 반대로 재미있거나 유쾌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찝찝하고 불쾌하며 심지어 反 희망적이고(비관주의나 염세주의란 말은 너무 약하다.) 우울해지는 작품이다. 물론 너무나 신랄하고 조소가 가득해서 반어적 의미에서 재미와 흥미가 가득 찬 작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지난해 칸 영화제가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대신(감독상) 이 작품을 선택했는 가를 일응 수긍할 수 있게 한다. 칸은 두 가지 갈래에서 감독의 손을 들어 주곤 하는데 ‘매우 사회정치적인 작품이거나 아니면 매우 예술적인 작품이거나’이다. 외스틀룬드의 영화는 매우 사회적 리얼리티가 강한 작품이다. 이 세상을 묘사해 낸 내용들이 너무 적확해서 거꾸로 내용 하나하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칸 심사위원들은 지금 세상에 이런 영화가 필요하다고 봤을 것이다. ‘슬픔의 삼각형’은 자본주의 세상에 대한 뛰어난 분석서이며 일종의 新 자본론이다. 아마도 마르크스가 봤다면 박장대소하고 웃으면서도 동시에 세상이 자신의 말이
안타깝게도 국내외 모두에서 흥행에 실패한 실사영화 ‘인어공주’는 몇 가지 지점에서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도 두드러질 만큼 아주 다른데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인어공주가 흑인이라는 점이 제1의 요소는 아니다. ‘공주=흑인’은 차이라기 보다 비교적 단순한 특징, 캐릭터의 외모 설정에 불과하다. 인어공주가 흑인이기 때문에 내용이 달라지거나 극 전체의 톤 앤 매너가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냥 피부가 까매서 처음엔 다소 ‘신기하게’ 느껴지다가도 이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이번 ‘인어공주’가 안데르센의 원작이나 1989년에 나온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와는 궁극의 지점에서 각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1) 원작과는 결말을 완전히 다르게 갔다는 것이고 2) 1989년 애니메이션과는 왕자의 캐릭터가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이번 실사영화에서 왕자는 ‘백마를 탄’ 이미지가 아니다. 그는 다른 선원들과 함께 갑판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백성처럼, 일반 국민처럼 살아가려는, 그래서 ‘보통 사람의 정치학’을 깨달아 가려는 꽤 괜찮은 덕목의 지도자 청년으로 나온다. 심지어 왕자는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다. 외모상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