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년 전, 그는 당나라의 2대 황제(598-649)였다. 후대로부터 중국 5천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통치기간은 627년부터 649년까지. 24년간이었다. 당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당시 세계최강의 제국이었다. 그의 치세(治世)를 역사가들은 ‘정관지치’(貞觀之治)라고 칭송했다. ‘세상을 올바르게 본다’는 뜻의 ‘정관’(貞觀)은 태종의 연호다. 그는 공자를 존경하고 따르면서도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무위지치(無爲之治)가 최고의 정치라는 것을 깨닫고 실천했다. 도교(道敎)를 국교로 삼은 것이 그 증거다. 불교를 공부한 후에 역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지체없이 유불도 삼교정립(儒佛道 三敎鼎立)을 국가의 사상적 정체성으로 정립(定立)시켰다. “철학자가 군주가 되거나, 군주는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철인정치론에 합당한 인물이다. 그의 위대한 리더십을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노장공맹(老壯孔孟), 그 2천년 스승들의 핵심사상이 체화된 품격정치의 바이블이다. 아래의 인용문들은 ‘정관정요’에 나와 있는 태종의 사람됨과 그의 정치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뽑아서 일을 시켰다. 그들
1910년 8월 29일. 조상들은 그날을 왜 망국(亡國)의 상실과 분노, 거대한 슬픔의 날로 규정하지 않고, ‘국치(國恥)의 날’이라고 천명했을까. 그로부터 100년도 훨씬 더 지난 오늘날도 우리는 모두가 그날을 ‘크게 부끄러운 날’로 상기한다. 참으로 특별하지 않은가. 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날, 무너진 가슴을 안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온 가장이 빈 쌀독을 바라보면서, 그는 가족이 조만간 다 함께 굶어죽을 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기 전에, 그보다 더 먼저 그 처지를 부끄러워하였다. 조상들은 그런 족속이었다.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나는 조상들의 그 특별한 마음을 늘 불행 중 ‘다행스러운 자산’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뿌듯해했다. 강도에게 가진 걸 모두 털린 사내는 우선 목숨이라도 건진 것을 조상의 음덕(陰德)이라 여기고, 정신 차리고 나서 그 상실을 아까워하고 분노하고 두려움에 떨며 걱정하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맨 먼저 부끄러워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 이후, 일제 35년은 이 민족이 그 ‘큰 부끄러움’을 줄이고 또 줄여서 끝내 제로로 만들려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망국의 슬픔을 감당하고 이겨내는 공동체의 정신으로써, 그리고 국권회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일본의 20대 청년 하나가 3년(1878~1881) 동안 조선의 무인도를 탐사한다. 다도해 부근에도 수시로 왕래하면서 조사했다. 현해탄도 네 차례나 항해했다. 그는 메이지 정부를 반대하는 인사들과 어울려 군대를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곧바로 큐슈의 한 정치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가서 한문 선생을 하기도 했다. 그 얼마 후, 마음에 맞는 친구와 '근대시문학'(近代詩文學)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여러 해 동안 출판사를 했다. 시도 썼다. 동양사회당(東洋社會黨)을 창당, 평등세상의 꿈을 선포하고 도전했으나, 시대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정당은 해산당하고 두 차례나 옥살이를 했다.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의 후원자이며 동지였다. 이토록 다종다양한 경력은 그를 당대의 석학으로 진화시켜주었다. 중국과 조선에도 자신의 뜻을 전하여,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이른 바, ‘대동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1850~1922)라는 사람이다. 위와 같이 호기심이 강했다. 야심도 컸다. 게다가 똑똑하기도 했다. 그의 책 '대동 합방론'이 나온 것은 1893년이었다. '일본인'이란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낸 것인데, 특히 중국에서
최근 국방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계엄과 전쟁에 관한 공방이 뜨거웠다. 이 논쟁에 국민의 힘 한기호 의원(3선)의 문자메시지가 기름을 부었다. 그는 "우크라이나와 협조가 되면, 북괴군부대를 폭격, 미사일타격을 가해서 피해가 발생하도록 하고, 이 피해를 북한에 심리전으로 썼으면 좋겠다"는 문자메시지를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에게 보냈다. 신실장은 "잘 챙기겠다. 오늘 긴급대책회의 했다"고 답했다. 소름끼친다. ‘조일 7년전쟁’(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뒤 서울의 모습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지옥이었다. "전쟁이 끝난뒤 흉년에 염병까지 돌아 수구문(水口門. 지금의 광희문) 밖에 버리는 시체가 산을 이뤘다. 그것을 처리하는데 1년이 넘게 걸렸다. 황소 한 마리값이 쌀 서말, 무명 한 필에 좁쌀 두서너 되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 죽으면 달려들어 그 살을 뜯어먹었다. 왜군은 지놈들 필요한 모든 걸 약탈하고, 명군(明軍)은 전국의 소 돼지 개 닭을 다 잡아먹었다. 술 취한 명군이 토악질을 하면 다투어 핥아먹고, 약한 놈은 그것도 못먹어 울부짖었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중 조선편 한 대목이다. 어느 시대 어느 대륙에서든 전쟁이 끝나면, 장삼이사 씨알들은
1929년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소년은 열네살에 5년제 경성공립공업학교(현 서울공고)에 입학한다. 4학년때 해방을 맞았다. 이듬해에 국립해양대학에 들어간다. 공업학교와 해양대학은 국비였다. 가난한 청년이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대학을 마치고 안동중학의 영어선생이 되었는데, 바로 내전(6.25)이 터져서 군에 들어간다. 유엔군 연락장교가 되었다. 1957년 소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7년간 주로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벤 플리트 유엔군사령관 등 주요장성들 통역을 했다. 예편과 동시에 합동통신 기자가 된다. 대부분 서울대학 출신들이었던 당시 외신부에서 그 누구도 선생의 영어를 따라오질 못했다. 그 탁월함으로 미국대사관의 공보담당이나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주요매체들의 민완기자들과 신뢰와 교분을 쌓았다. 그로써, 5.16 이후 1960년대 우리 언론계에서 외신특종은 대부분 리영희가 도맡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61년 박정희와 케네디의 정상회담이었다. 동아 조선 등이 정상회담 성과를 과대포장하며 구테타 세력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을 때, 합동통신의 리영희 기자는 미국기자의 제보를 받아 "케네디의 한국원조는 박장군의 민정이양 댓가"라는 대특종을 날린다.
“인간사회에서 슬픔의 종류는 허다하나, 나라를 강탈당한 망국노(亡國奴)의 치욕, 그 이상 가는 슬픔은 없을 것이며, 기쁨의 종류도 허다하나 잃었던 자유를 되찾은 기쁨이야말로 최고의 환희일 것이다.” 훗날 광복회장을 역임한 독립투사 故이강훈 선생(1903~2003)의 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사》의 첫 문장이다. 우리 조상들은 1910년 8월 29일 그날을 왜 망국의 상실감으로 인한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지독한 분노를 담아서 규정하지 않고, ‘국치(國恥)’라고 여기고 그렇게 말했을까. 그 후 100년도 더 지난 오늘도 우리는 그날을 ‘부끄러움’으로 상기하며, 그날의 조상들처럼 치를 떤다. 힘 없고 가난했지만, 누구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앉아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아무 때든, 어디서고 편하게 누워서 쉬고 또 일하던 사람들이, 필요한 걸 찾아서 궁핍과 남루를 그럭저럭 감당하며 살던 사람들이, 이젠 그 어떤 일도 맘대로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처량한 신분은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들이었다. 그 통한(痛恨)의 시간에, 그 가엾은 족속의 눈에는 빈 쌀독과 대여섯씩이나 되는 처자식의 입이 가장 먼저 들어온다. “우리 식구들이 머지않아 굶어죽겠구나
전라도 보성 벌교에 100미터 남짓 되는 나지막한 산 하나가 있다. 부용산이다. 부용(芙蓉)은 산에서 사는 연꽃이다. 같은 이름의 산이 전국에 열 개나 되는 걸로 보아, 부용은 이름 없는 무명의 씨알들처럼 이 땅에 흔하디 흔한 야생초다. 나는 오는 8월 31일 공장의사 김현주 선생(종합예술단 봄날의 소프라노)의 작은 음악회에 우정출연하여 ‘부용산’을 부른다. 요즈음 지하철에서든 다방에 앉아서든 중얼거린다. 완벽하게 외웠다고 자신할 때, 가사가 생각나지 않는 대형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랫말은 슬픈 서정시다. 눈물겹다. 노래 부르다가 울음보가 터질 것만 같다. 특별한 시 ‘부용산’이 오늘날 묵직한 명곡으로 자리잡게 된 배경이 궁금하여 여기저기 드나들며 공부 좀 했다. 시인 박기동은 1917년 여수 출생으로, 열두 살 때 벌교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지역에서 이름있는 한의사였다. 그 덕택으로 열네 살에 일본의 중학교로 유학을 갔으며, 관서대학 영문과를 다녔다. 해방 전에 귀국하여 1944년 벌교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교가도 지었다. 해방 후, 광주로 전근가서 가르치다가 벌교중학으로 돌아왔다. 여기서도 교가를 지었다. 그 후 1947년 순천사범
나는 일본과 이웃하여 사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10만년에서 3만년 전 사이의 어느 때까지는 우리의 대륙과 붙어 있었기 때문에 선사시대 원주민들의 영토에 우리의 조상들은 물론 중국과 몽골족, 시베리아 인종들 다수가 건너가서 오늘날 일본족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 저 대한해협은 1만2천년 전에 생겼다고 한다. 일본에 대해서 관심이 크다.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 특히 한국말 좀 하는 일본친구들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며 질문을 많이 한다. 지난 연말연시를 휴가차 서울에 온 일본의 유력지 기자와 보냈다. 노래하고 춤추고 마시고 얘기하고…특별한 시간이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일어판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은 특별한 친구다. 내가 속한 ‘씨알의 소리’에, 45년 전 그가 경험했던 감격적인 독서와 그 기쁨과 쑈크를 내용으로 기고하게 하였다. 멋진 인연 아닌가. 조만간 양국에서 각 열명씩 참여하는 문화교류협회를 만들어 왔다갔다 하며 함께 놀기로 했다. 작년 9월, 나는 본 지면에 ‘일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20년 전, 일본총리 고이즈미에게 썼던 편지글이었다. 반응이 뜨거웠다. 일본에 대한 나의 관심은 함석헌 선생의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을 읽고나서부터다.
선생께 이렇게 공개편지를 쓰게 될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라인-야후 사태’가 궁금해서 요즘 귀사의 형편이 어떤가를 살펴봤지요. 걱정스런 내용들이 많더군요. 곧 상승기운 넘치는 낭보를 기대합니다. 제가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참 오래 전입니다. 책을 통해서였지요. 당시 한국에 '손정의' 이름이 붙은 책이 20여 권이 나와 있었고, 나는 그 책들을 빠짐없이 읽었습니다. 감동의 연속이었으니까요. 지금은 120권이 넘었네요. 그 어린 소년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당당하고 지혜롭게 유학생활을 감당하는 모습은 실로 ‘장관’(壯觀)이었습니다. 2년제 칼리지에서 버클리대학에 편입할때였지요. 영어능력 시험(placement test) 감독에게 “나는 지금까지 일본말만 했다. 저 친구들은 모두 영어권 출신들 아닌가. 영어사전을 달라. 시간도 두 배로 달라”고 말했지요. 감독은 받아들였고요. 정말 탄복했습니다. 개강하자마자 컴퓨터학과의 한 교수를 찾아가 영어-일어 자동번역기 개발을 의뢰하였지요. 용역비는 물론 외상이었습니다. 교수는 그 동양청년의 당돌하고 자신감 넘치는 제안에 말없이 싸인했습니다. 젊은이가 훗날 수퍼맨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방학 때 제품을
고교시절, 이 역사를 읽고서 조선에는 세종 말고는 제대로 된 것들이 하나도 없었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쌍욕을 했었다. 그 굴욕의 스토리를 오랫 동안 잊고 살았는데, 영화 ‘남한산성'이 상기시켜 주었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리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잊을 수 없다. 조선의 임금이 저 높은 자리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청나라 왕에게 절을 세 번 한다. 한번 할 때마다 이마로 땅바닥을 세 번씩 찍는다. 저질정치가 늘 국난의 원인이었다. 그 굴욕은 마치 a파가 b파의 어깨들과 아지트를 초토화시킨 뒤, 혹시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깡다구’ 기질도 깡그리 유린하는 조폭세계의 인수합병 의식과 차이가 없다. 국가간 정치외교도 그렇다. 나라의 대표들이 참모들과 함께 국리민복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디어가 잠든 시간에 주먹 쎈 쪽의 마음대로 이미 결론을 내놓은 것이다. 점잖고 매끄러운 어휘들로 이루어진 문장으로 힘의 논리를 가리웠을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건달들의 법칙이다. 4.10 총선이 야권의 압승으로 끝났다. 부정선거 논란이 없는 걸 보면, 윤패는 이길 것으로, 적어도 반타작은 할 것으로 전망했던 것 같다. 한달이 지났다. 그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