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고향이 어디신가요?” 라고 묻곤 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어디 나오셨어요?”라는 질문이 자연스럽다. 이는 곧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는 뜻이다. 고등교육이 보편화된 시대에 출신 대학을 묻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특정 대학 출신들이 사회 곳곳에서 집단적 유대와 특권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사회구조의 병폐가 된다. 지난해 한국은행이 발표한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방안'(2024.8.27.)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로 ‘대학입시 경쟁’을 지목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의 대학 진학률 격차는 부모의 경제력과 사교육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과도한 경쟁과 학업 스트레스로 행복도가 낮아지고, 수도권 집중과 주택가격 상승까지 초래한다. 부모의 경제력과 사교육 환경이 학생의 잠재력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교육기회의 불평등이다. 교육비 부담은 저출산과 결혼 기피로 이어지고, 계층 간 이동의 사다리는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입시 서열화는 곧 학벌사회를 고착시킨다. 우리 사회에서 학벌(academic clique)은 단순한 학력이 아니라 일종의 ‘신분’처럼 작용한다. 학력은 개인의 노력의 결과이지
이재명 국민주권정부에서 시민단체의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 낸 시민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임을 떠올리면 역설적이다. 정부 출범 100일이 넘었지만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정부의 혁신과 운영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시민사회 내부의 요인이다. 4월 4일 윤석열 퇴진을 주도한 ‘윤석열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4월 17일 국회에서 사회대개혁을 위한 정책대안을 발표한 뒤, 6월 10일 자진 해산을 결의했다. 사회대개혁의 후속 노력이 이어지지 못한 채 해산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9월 23일, 각계 시민단체들이 다시 모여 ‘국민주권사회대개혁전국시국회의(전국시국회의)’로 통합을 결의하며 새로운 도약의 뜻을 밝혔다.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사회대개혁”을 다짐한 이 결의는 늦기는 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음으로는 국회 중심의 개혁 드라이브가 한 요인이다. 국회는 내란·김건희·채상병 등 이른바 3대 특검을 중심으로 적폐 청산과 개혁 작업을 주도해 왔다. 지난 9월 26일 국회는 정부조직개편안을 확정하였다. 이제 정부는 시민사회와 협력하여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출구
이재명 정부 국정기획위원회는 지난 8월 13일 대국민보고대회를 열고 123개 국정개혁과제를 발표하면서,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여성의 권익 신장과 양성평등을 중심에 두어 온 여성가족부가 이제 성평등을 전면에 내세우는 부처로 바뀌는 것이다. 이 변화가 우리 사회에 미칠 파장과 영향은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정부는 왜 굳이 여성가족부의 이름을 바꾸려 하는 것일까? 여성가족부는 2001년 김대중 정부에서 ‘여성부’로 출발했다. 여성 차별을 해소하고 지위를 높이며,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이 설립 취지였다. 이후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여성가족부’로 확대되었고, 이명박 정부 시기에는 두 차례 명칭이 오가다가 다시 여성가족부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여러 정권을 거치며 여성정책의 방향이 조정되어 왔다. 법적 기반을 보더라도, 1995년 김영삼 정부는 '여성발전기본법'을 제정했고, 2014년 박근혜 정부는 이를 전부 개정해 '양성평등기본법'을 만들었다. 이 법은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보장하는 동시에, 성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았다. 주목할 점은 여기서 성평등의 개념도 함께 언급되었다는 사실이
통일부의 명칭 변경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통일부는 1969년 ‘국토통일원’으로 출발해 1990년 ‘통일원’으로, 1998년 이후에는 현재의 ‘통일부’로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통일부’ 명칭을 바꾸어 보자는 논의는 없었다. 하지만 2025년 7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명칭 변경은 여야가 함께 논의해야 할 중대한 사안”이라며 ‘한반도부’ 같은 명칭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다. 사실 통일부라는 이름은 우리 국민에게 오랫동안 익숙한 것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 속에서 통일부는 국가조직의 자연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독일의 사례를 보면, 명칭 변경이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남북관계를 실용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독은 1951년 ‘전독일문제부’(BMGF)를 설치해 동서독 문제를 다뤘다. 이것은 독일연방헌법 제23조를 근거로, 분단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동독의 국가성을 부인하고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교류는 이뤄지지 않았다. 전환점은 1969년 빌리 브란트 총리(1969.10-1974.5)가 등장하면서 부터 였다. 그는 “현실을 극
지금 남북관계는 굳은 빗장으로 닫혀 있다. 2023년 12월 북한의 노동당 중앙위가 8기 9차 전원회의에서 “북남관계는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 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1991년 노태우 정부와 북한(김일성)이 체결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남북관계는 모두 동결되었고 군사적 충돌위험 마저도 상존하였다. 6월 3일 제21대 대통령선거를 통해 시작된 이재명 정부는 어떻게 남북관계의 물꼬를 열어야 할 것인가?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통일 이후, 1991년 12월 13일 노태우 정부는 북한과 남북기본합의서(전문, 25개조)를 채택하였다. 합의서는 그 이후 남북관계의 기준이 되어왔으나 국회의 인준을 얻지 못해 법적 근거를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남북관계는 곤두박질 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쌓아올린 남북관계는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에 와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촛불혁명 이후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수립한 남북관계는 윤석열 정부에서 허물어졌다. 마치 ‘널뛰기’ 하듯이 남북관계는 요동하였다. 그러므로
6월 3일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6월 4일 새 정부(대통령 이재명)가 시작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불법 비상계엄’에 대한 탄핵으로 수립된 새 정부는 우선적으로 내란을 종식하여야 한다. 동시에 지난 1987년 이후 드러난 헌정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 대개혁을 추진하여야 한다. 새 정부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지켜야 할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국민주권이다.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 이것은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상해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로 부터 연원한다. 그러므로 민주공화제를 파수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보존하는 것과 같다. ‘12.3 불법 비상계엄’의 위기로 부터 민주공화국을 수호한 것은 국민과 국회이다. 이제는 평상시에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야 한다. 국회의원을 선임하여 국회를 구성하고, 나아가 국민이 직접 법안을 발의(initiative)하고 대표를 소환(recall)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국민주권정부에 합당하다. 둘째는 국민의 인간다운 삶이다. 이것은 세끼
5월 1일 대법원이 이재명 상고심 사건을 ‘유죄’로 인정해 파기환송했다. 이 사건은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재명 대통령후보의 발언을 검찰이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고등법원에서 무죄로 판시한 것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유죄로 인정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절차와 내용면에서 공정성을 상실해 위기를 자초했다. 절차면에서, 대법원은 내규를 위반해 재판을 진행했다. 그동안 1심 선고(2024.11.15.) 까지는 2년 2개월이, 2심 선고(2025.3.26.)에는 4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상고심 선고는 항소심 선고 후 36일만에 판결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심리절차에 관한 내규' 제7조를 보면, 재판연구관이 전원합의 사건에 관해 조사·연구한 결과를 미리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소부 배당 당일 바로 전원합의체 심리를 함으로써 재판연구관이 조사·연구한 결과를 미리 볼 수 없었다. 전원합의체는 배당 9일 만에 2차례 심의했을 뿐이다. 이것은 국민기본권의 침해이다. 내규도 따르지 않은 채, 자료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판결한 대법원에 시민들은 ‘자료열람기록의 공개’를 청원(100만 명) 하기에 이르렀다. 내용면에서 이번
헌법재판소는 4월 4일(금) 윤석열 대통령 탄핵선고를 예고하였다. 지난 해 12월 14일 국회에서 탄핵이 의결된 후 111일이 경과한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63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91일이었던 데 비해 이례적으로 길다. 그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그 이전에 비해 더욱 심대하고 그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헌재의 시간은 사흘 후에 마무리하게 된다. 그 시간은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될까? 기회인가 아니면 혼돈인가! 정치의 문제를 법에 호소하는 것은 정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정치가 나라를 바르게(政者正也) 하지 아니하거나 절충과 타협을 이루어내지 못할 때 정치는 법에 의뢰하게 된다. 국가의 원수(헌법 제66조)로서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대통령은 국가를 통치하는 책무가 부여된다. 대통령이 정치를 풀어내지 못하면 그는 무능한 대통령이다. 법치에 따르지 않고 자기 망상에 사로잡혀 권력을 행사하면 그는 포악한 대통령이 된다. 그러면 시민(국민)들이 일어나게 된다. 시민들이 잠잠하면 길가의 돌들이 일어나 소리 지르게 될 것이다(눅19:40). 그러므로 시민의 목소리는 하늘의 소리이다. 지금 광화문에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천지를 가른다. 1987년 6월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1392년 조선이 한양에 개국하고 3년후 경복궁을 건립하면서 정문을 세웠다. 세종 때 정문을 광화문으로 명명하여 오늘에 까지 이어진다. 광화문 앞 거리는 육조(六曹)거리 라고 불리우고 양 옆으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였다.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국정이 논의되고 시장이 열렸다. 지금은 육조거리가 세종로거리로 지명이 바뀌어 정치의 광장이 되고 있다. 광화문에서 세종로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곳에서 탄핵의 찬⦁반을 둘러싸고 함성소리가 장안을 가른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지만 주장하는 목소리는 상반된다. 이제 우리는 가뿐 숨을 멈추고 광화문으로부터 들려오는 역사의 소리를 들어보자. 광화문은 1592년 임진왜란 때에 허물어지고 1865년 대원군에 의해 복원되었다. 복원된 광화문이 다시 허물어지질 위기를 맞은 것은 일제시기였다. 일제는 경복궁 경내에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을 철거하려고 하였다. 이때 광화문 철거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울린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하였다. 네가 이 세상에 있다는 기억이 냉랭한 망각 가운데 장사(葬事) 되어 버리려 한다” 이것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목소리였다. 1922
지금 탄핵정국은 예사롭지 않다. 지난해 ‘12.3 비상계엄’ 이후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12.14)하고 체포, 구속 수사하고 있는 가운데,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저항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17년 3월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파시즘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파시즘은 강력한 국가주의를 강조하며 권위주의적 통치가 특징이다. 이러한 파시스트 운동은 대중의 불만을 이용하여 지지를 확보하고, 선전과 선동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며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려 한다. 거짓말을 반복적으로 하면서 대중을 조종한다. 역사학자 페데리코 핀첼스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거짓말은 다른 정치 전통에서는 볼 수 없는 파시즘만의 특징이다”(<파시스트 거짓말의 역사>, 장현정 역, 2023)라고 하였다. 거짓 선전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것은 무솔리니, 히틀러가 그랬고 윤석열 또한 그러하다.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국회에 통보(헌법 제77조 제4항)하지도 않은 채, ‘체제전복을 노리는 반국가세력’의 준동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안전을 지킨다고 하면서 불법으로 국회에 침입했다. 여소야대 국회를 체제 전복세력이라고 한 것은 거짓선동이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