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사유(私有)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소크라테스는 ‘나는 세계시민’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을 세계의 주민이며 세계의 시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땅이 지주들의 사유재산이고 그들이 지상권을 가지고 있다면, 땅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땅 주인의 승낙을 얻어야만 지상에서 살 수 있는 셈이다. 그들은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을 권리까지 땅 주인의 승낙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땅 주인들이 그들에게 사람이 서 있을 장소를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지구 밖으로 쫓겨나야 할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 땅의 소유는 노예의 사유와 마찬가지로 물건을 사유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어떤 사람이 한 사람으로부터, 또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돈이나 물건, 가축 같은 것을 약탈한 경우, 그 사람이 떠나면 동시에 그 약탈은 끝난다. 물론 시간의 흐름이 그 사람의 범죄행위를 좋은 행위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범죄의 결과를 소멸시킬 수는 있다. 곧 범죄행위는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과 함께 즉시 과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한테서 땅을 빼앗는다면 그 약탈행위는 영원히 지속된다.
자기의 자아 속이 아니라 모든이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하느님의 영혼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인정하는 것을, 예수는 사람의 아들/딸을 높이 들어 올린 것(요한 8:26)이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예언자였다. 그는 영혼의 신비를 보았다. 그리고 인간의 위대함을 보았다. 그는 인간의 육체에 살고 있는 신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환희와 기쁨 가운데서 이렇게 외쳤다. “나는 신의 아들이다. 신이 나를 통해 행하시고 나를 통해 말씀하신다. 그것을 네가 보고 싶으면,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네가 생각하고 느낄 때 너 자신을 들여다 보아라.” 사람들의 마음에 살고 있는 신의 법칙을 인식한 예수는 다른 어떠한 법칙에도 이 법칙을 종속시키지 않았다. 그는 이 법칙이 바로 신 자체라고 인정했다. (에머슨) “나와 하느님은 하나이다!”라고 예수는 말했다. “그러나 만약 너희가 내 육체를 하느님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또, 다른 모든 존재에서 독립한 나의 비육체적인 존재를 하느님으로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다. 너희가 너희 자신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참으로 하느님과 하나이며 모든 사람 속에서도 동일한 자아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너희는
부자는 아무래도 무자비해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가 인간다운 자비심을 발휘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이내 가난해질 것이다. 우리가 식탁에 둘러 않아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배불리 먹고 있을 때, 길가는 사람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화를 내고 사기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부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빵 한 조각 때문에 남에게 사기를 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설령 그 사람이 정말 그랬다 하더라도, 너는 그를 가엾게 여기고 더욱더 그 사람을 가난에서 구해주어야 한다. 만일 네가 끝까지 자선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적어도 그들에게 모욕만은 주지 말아야 한다. (요한) 먼저 약탈을 중지하고, 그 뒤에 자선을 베풀어라. 부정한 돈에서 손을 뗀 뒤, 그 손을 이웃을 위해 내밀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제 손으로 어떤 사람의 옷을 벗겨, 같은 손으로 다른 사람에게 입힌다면, 우리의 자선 행위가 곧 범죄행위에 대한 방아쇠가 되는 셈이다. 그 같은 자선은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요한) 부자가 자선 행위를 할 때만큼 그의 잔인함이 잘 드러날 때는 없다. 부잣집에서는 세 사람 앞에 열다섯 칸의 방이 있지만, 가난한 사람이 몸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지식이 있다. 그러한 지식을 자기 것으로 하지 않는 한 다른 모든 지식은 오히려 유해하다.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자신의 제자들에게 어떤 학문이든 그것을 올바르게 배우기 위해서는 일정한 한도를 지키고 그것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학문에 너무 열중하면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자기완성에 써야 할 시간과 정력을 잃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식을 수집하고 다니는 학자는 불쌍한 사람이다. 끝없는 지식욕에 쫓겨 스스로를 높이는 철학자들 또한 불쌍한 사람이다. 이 나쁜 부자들은, 옆에서 나자로가 계속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을 때, 날마다 그 지적 유희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들은 모두 헛된 지식으로 배가 터질 지경이 되어 있다. 그들의 쓸모없는 지식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적 완성이나 사회의 향상과 진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페늘롱) 경험적 과학이 그 자체만을 위해 연구되고, 지도원리로써의 철학적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마치 눈이 없는 얼굴과 같다. 그것은 중간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런 세세한 연구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최고의 자질이 결여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학문이다.
자신의 내적인 사명을 수행하며 영혼을 위해 사는 가장 효과적인 삶은 사회생활의 개선에 봉사하는 길이다. 사람들을, 그 내적 생활에서 해방되어 있는 것 이상으로 외적 생활에서 해방시킬 수는 없다. (지르첸) 공상가는 종종 정확하게 미래사회를 예측하고 그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앞당기려고 한다. 자연에 있어서도 천년의 세월이 필요한 일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성취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레싱) 너희는 몇몇 폭군이라고 파멸시켰지만, 곧 전보다 훨씬 더 악랄한 폭군이 나타났다. 너희는 노예제도를 타도했으나, 곧 새로운 피의 제도, 자유라는 이름 하에 욕망성취라는 더욱 새로운 노예제도가 너희에게 주어졌다. 지배자가 누가 되느냐에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이 지배자로 있을 때 자유가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정의와 인애가 지배하는 나라이며, 그 기초는 그리스도가 정한 계율에 의한 신앙, 즉 인애와 정의의 법칙에 대한 신앙이다. (라마에) 만일 남에게 선을 가르칠 수 있는데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가장 소중한 형제를 잃게 될 것이다. (중국 격언) 자신의 영혼을 더욱 개선하고 완성시키면 평생의 일에 힘써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육체 속에는 누구나 똑같은 신적 본원이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든 인간의 집단이든, 그 신적 본원과 육체의 결합체를, 즉 사람의 목숨을 파괴할 권리는 없다. 사람이 사람을 죽기는 일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사람을 죽인다면 그는 살인자이다. 두 사람, 열 사람, 백 사람이 사람을 죽여도 그들 역시 살인자이다. 그러나 한 국가, 한 민족의 경우, 사람을 아무리 많이 죽여도 살인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훌륭한 공이 된다. 되도록 많은 사람을 징집하죠 몇만 명을 살육하는 그건 이미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일까? 어째서 한 사람, 열 사람, 백 사람은 살인죄를 저질러서는 안 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면 괜찮다는 말인가? (아딘 발루) 국방의 의무란 무엇인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젊은이가 신체적으로 성장하여 부모를 도울 수 있게 되면, 곧바로 그를 강압적으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신체검사를 한 다음, 국민의 의무라는 이름하에 상관의 명령에 복종할 것, 명령을 받으면 누구든지 살해할 것을 맹세하게 한다. 그가 그 이성과 양심에 반하고, 종교의 가르침에도 반하
어떤 사람 속의 이성이 점점 강해져 번뇌가 점점 사라질수록, 그 사라지는 곳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영혼의 생활이 해방된다. 의식적으로 그 해방에 참여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실수와 착오가 일어나도 실망하지 말라.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것처럼 공부가 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자기를 교육하는 가장 방법의 하나이다. (칼라일) 자기와 상관없는 일로 마음을 괴롭히지 말라.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 그럴 바엔 자기 자신을 바로잡아 자기완성을 향하는 길을 서두르는 것이 좋다. 우리의 현재 생활은 바로 우리 조상들의 생활이 인류에게 유산인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 도덕적인 유산이다. 우리가 행한 위대한 행위는 우리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삶의 지표가 될 것이다. (조지 엘리엇)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의 영혼은 육체라는 관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관, 즉 우리의 육체는 서서히 허물어지는 반면 우리의 영혼은 점점 더 자유로워진다. 그리하여 육체가 죽었을 때 영혼은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작고 사소한 악이라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했지만 앞으로는 하지 않겠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한번 저지른 죄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한 마리의 제비로는 봄을 부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미 봄을 느끼고 있는 첫 번째 제비가 날지 않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그처럼 온갖 꽃봉오리와 풀이 그저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라면 봄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자기가 첫 번째 제비든지 아니면 천 번째 제비인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 그것이 영원한 것은 하늘과 땅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인도 자기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영원해진다. 그는 영원해짐으로써 비할 데 없이 강력해지고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한다. 개인의 생활이든, 사회 전반의 생활이든, 법칙은 오직 하나, 그 생활을 개선하고 싶으면 그것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냐 예속이냐 하는 인류 미래의 운명이 걸려 있는 오늘날, 이같이 중대한 시점에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병사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또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생활을 한 하느님 나라 군대 지휘관의 본보기를 따라야 한다. 죽은 사람이란, 변천하는 것에 대한 번민
지혜로운 사람이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알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학자란 책을 읽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교양인이란 그 시대에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지식과 풍속, 관습을 완전히 터득한 사람을 말한다. 현자란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오늘날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필요 없는 지식을 산처럼 가득 채워 넣고 자신을 학자나 교양인, 현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의의도 모르면서 오히려 그 모르는 것을 자랑하는, 깊은 미망의 구렁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학 분자식도 모르고 라듐의 시차와 그 성질도 모르는 무지한 문맹자 가운데, 인생의 의의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지혜로운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으며, 다만 끝없는 자만에 의해 더욱 미망의 구렁에 빠져드는 사이비 지성인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유일한 학문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학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의 손에 닿는 학문이다. 생명의 원리는 스스로 함이므로 이론으로 하면 진리는 곧 나 자신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생각만 하면 스스로 깨달
단순히 도덕적인 생활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도덕을 초월하는 것을 추구하라. (소로) 그리스도에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가 인간 영혼의 위대함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는 인간 속에서 신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 어떠한 성격의 인간이든 그들 모두를 사랑했다. 예수는 인간의 겉모습을 꿰뚫어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육체는 그의 앞에서는 사라져 버렸다. 그는 부자의 아름다운 옷과 가난한 자의 누더기를 뚫고 그 안에 있는 인간의 영혼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는 무지의 어둠과 죄의 얼룩 한가운데서 무한하게 발달할 수 있는 힘과 완성의 싹을, 불멸의 영적 본성을 보았다. 그는 타락의 극에 달한 인간의 내부에도 빛의 천사로 바뀔 수 있는 본질을 보았다. (채닝) 신의 의식에는 지적인 것과 신앙에 바탕을 둔 도덕적인 면이 있다. 지적 인식은 허약하여 위험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 한편 도덕적 인식은 도덕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자질만큼 신에게 돌리려 한다. 그와 같은 신앙이야말로 자연인 동시에 자연을 뛰어넘는 것이다. (칸트) 사랑이 우리 생활의 본원은 아니다. 사랑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닌 것이다. 사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