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말 쯤이었을게다. 나는 대구에서 울산으로 가는 마지막 고속버스 맨 뒤편 좌석에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통에 눈을 떴다. 눈앞에 정복경찰 두 명, “신분증 좀 봅시다” 내미는 주민증을 보더니 “주민번호가 어떻게 되요?”하고 물었다. 아뿔싸.. 당시 나는 5공화국의 3년차 수배자였다. 주민증은 우리 친형님의 것이었는데 늘 외우던 주민번호가 갑자기 가물가물했다. 자다 깨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했더니 차에서 내리란다. 경찰이 앞장서고 내가 통로를 뒤따라가는데 누가 부른다. “아저씨, 가방요~” 내 발밑에 두었던 가방을 가져가라는 소리다. 아.. 어떻하나.. 고백컨대, 가방에는 족히 수십명은 조직사건으로 엮고도 남을 만치의 비합법 노동운동조직의 문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잡히는건 문제도 아닌.. 가방만은, 가방만은 숨겨야 했다. 내가 모른채 그냥 걸어가자 주변 사람들도 더 큰 소리로 이어받았다. “가방 가져가래요~”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몇걸음 앞장선 경찰은 무전 하느라 아직 못들은 눈치, 저 소리를 잠재워야 한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렸다. 그리곤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제발 닥치라고~ 이러다간 다 죽어”라는
5년의 임기를 거의 마쳐가는 대통령의 얼굴은 부어 보였고 표정은 굳어있었다. 역대급 임기말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대통령은 마지막 대담에서 하얗게 불태우고 재만 남은 신갈나무 그루터기처럼 보였다. 그는 때로는 짙은 아쉬움과 회한을 비치기도 하였고 한편으론 작심한 듯 세간의 비판에 항변하고 깊은 우려를 전하기도 했다. 나는 대담을 보면서 분노를 억누르며 말하고 있음직한 대통령의 항변과 우려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스스로 아이러니라 언급했던 야당후보로 변신한 검찰총장의 당선! 곧바로 숱한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이는 집무실 이전을 둘러싼 기행들, 또 차기정권 각료인선에서 불거지는 목불인견의 잡음들을 지켜보는 대통령의 마음은 어떠할까? 탄핵이란 폐허를 딛고 애써 쌓아 올린 대한민국이란 공든 탑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잠을 이루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나를 안타깝게 만든 것은 정작 문재인 대통령이 선거패인을 묻는 질문에서 “나는 한번도 링 위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는 대목이었다. 아니.. 선거는 힘을 모아 교대로 싸워야 하는 태그매치였다. 야당은 합종연횡으로 태그매치 상대까지 바꿔가며 링에 오르는데 여당은 현직 대통령이 링을 떠나버렸으니 낭
2016년, 대장내시경을 받기 위해 수면유도제를 맞고 잠든 여성 환자 3명을 유사 강간한 의사 양 모 씨가 있었다. 의사라는 직위를 이용해 저항이 불가능한 환자를 능욕한 파렴치범이었다. 3년 6월의 징역형, 하지만 그의 의사면허는 자격정지 1개월 후 건재했다. 마왕 신해철을 의료과실로 숨지게 한 의사는 수차례의 동종 사망사고 때문에 두 번이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럼에도 의사면허를 박탈당하지 않고 의료행위를 계속하다 또 다른 사망사고 때문에 지금도 재판 중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의사면허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불사의 자격증이다. 대한민국 검찰이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한 채 세계 제일의 막강 파워를 누린다면, 대한민국 의사는 가장 생명력이 질긴 절대 면허를 쥔 셈이다. 그런데 이런 의사면허가 학창 시절 표창장 하나에 날아갔다. 부산대의전원 입학을 취소당하고 곧 의사면허까지 빼앗길게 뻔한 조국 전 장관의 딸 조민양 이야기다. 의사면허가 봄날 목련꽃잎처럼 이렇게 쉬이 떨어지는 것인 줄 처음 알았다. 부산대에 이어 때를 놓칠까 고려대도 나섰다. 한 젊은이의 삶이 통째로 말소당했다. 잔인하고 추악하다. 싸움을 하더라도 가족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건달들의 불문율이라더니
한동안 마주하지도 못한 채 이취임식을 치러야 할 것 같은 대통령과 당선자가 대선 19일 만에 만났다. 청와대 여민관 앞까지 마중나와 윤석열 당선자를 안내하는 문재인 대통령이 안쓰러웠다. 집을 넘겨주려 하는데 새로 들어올 사람은 “청와대는 제왕적 권력의 상징으로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는 판이니 짧은 안내조차 얼마나 공허한 몸짓이란 말인가? 국민과 소통을 위해 국방부 요새로 집무실을 옮기겠다는 희대의 권력교체기를 보면서 나는 마음을 토닥였다. “놀라지 말아라. 앞으로 기상천외한 일이 잦을 것이니..” 대통령선거를 치르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언론들이 기득권동맹의 한 축이 되어 검찰쿠데타를 응원하더라도 살아있는 권력을 탄핵하고 촛불혁명을 완수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집단지성은 결국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선거운동기간 동안 웬만한 후보라면 집중포화를 맞았을 최저임금 폐지발언, 주120시간 발언, 선제타격론 등 핵폭탄급 실언들이 무수히 반복되면서 막연한 정권교체 바람도 수그러들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마음을 담금질해야 했다. 때로 세상은 결코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음을.. 3월 10일 새벽, 검찰쿠데타의 완성을
본 칼럼은 어제(9일) 오전 9시까지 보내야하는 글이다. 당연히 대선 투표결과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칼럼은 오늘(10일) 실린다. 어떻게 써야 엉뚱한 글이 되지않을까?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껏 대선을 염두에 두고 칼럼을 실어왔는데 딴소리할 수도 없고 틀리건 맞건 내가 생각한데로 적을 수밖에.. 어젯밤 늦게까지 동영상 중계로 후보들의 마지막유세를 봤다. 한사람은 여전히, 아니 더욱 격한 어조로 상대후보를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나중엔 심지어 허위사실 논란이 일었던 여배우까지 무대에 세우며 상대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다른 한 사람은 비난보다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청계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더니 홍대 앞 마지막 유세에서는 사람들과 즉문즉답을 주고받으며 마무리를 했다. 덧보태 상대후보에게 “고생 많으셨다”고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선거에 임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은 선거결과에 따라 판이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나는 감히 예상하건데 이재명후보가 상당한 차이로 이길 것이라 본다. 왜냐? 대한민국 국민들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쭈엉(가명)을 만난 것은 1년 전, 공단 옆 원룸촌에서였다. 미얀마에 군부쿠데타가 일어나자 한국에 거주하던 미얀마교민들이 각 지역에서 집회 같은 항의행동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일 때였다. 지역 교민회 대표를 맡고 있던 쭈엉은 큰 눈에 선한 인상의 이십대 후반 젊은이였다. 야간근무 출근하기 전에 잠시 만난 쭈엉은 한국에 온 지 벌써 8년째, 이젠 십여 명이 일하는 사출공장에서 쭈엉이 없으면 공장이 돌아가지 못한단다. 쭈엉이 한국에서 자리를 잡은 후 여동생과 남동생까지 넘어와 일도 하고 학교도 다니고 있었다. 쭈엉은 훗날 결혼을 하더라도 당분간 가족이랑 한국에서 일을 더 하고 싶다고 했다. 고향에서 가족과 여유있게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윤석열후보가 "국민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얻는 외국인 건강보험 해결하겠다"고 했을 때 쭈엉이 떠올랐다. 지금도 공단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그와 동생들의 불안한 얼굴이 눈에 그려졌다. 반대로 유권자의 환심을 샀다고 신나 할 국민의힘 관계자들의 얼굴도 연상되었다. 그들에게 팩트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국인 직장가입자의 1명당 피부양자 수는 내국인의 37%에 불과하다는 사실, 2020년 한 해 동안 외국
새해 벽두부터 죽음의 행렬이 이어진다. 평택에서 화마가 세명의 소방관들을 삼키더니 광주에선 6명의 노동자들이 무너진 콘크리트 철근 속에 아직도 묻혀있다. 희생자 가족들의 절규와 눈물이 뉴스 화면을 떠나지 못한다. 지난 1년 동안 828명의 노동자가 산업현장에서 쓰러졌다. 빌딩은 높아져가고 도시는 화려해졌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몸을 갈아 넣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을까? 밥 딜런의 노래 가사처럼 바람만이 답을 알고 있을까? 끔찍한 사고가 이어지자 주 52시간제 때문이라고 얼빠진 소리를 하는 언론도 있다. 줄어든 작업시간에 공기를 맞추려 무리를 하다 보니 사고가 난다는데.. 그럼 주 120시간이라도 굴려야 사고가 줄어들까? 툭하면 사고의 원인을 노동자의 부주의나 시간 부족 탓으로 돌리고, 경영이 어려우면 최저임금 인상 탓으로 돌리는 버릇! 자본의 천박한 넋두리이겠지만 사회에는 사악하기 그지없다. 저임금 장시간노동이 이어질수록 현장의 생산성이나 안전시스템은 나아지지 않는다. 인력을 투입하는 것이 가장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사고가 발생하면 기업에 엄중한 책임이 뒤따른다는 법칙, 안전을 지키는 것이
군대를 제대한 아들이 집 근처 편의점 알바를 뛰었다. 늦게 퇴근한 아들이랑 쐬주 한 잔하며 얘기를 나누다보니 시급이 최저임금에도 못미친다. 왜그러냐고 물었더니 “에이, 아빠.. 편의점에 최저임금 다 주는 자리 없어요”한다. 가슴 한켠이 짠했다. 법적 최저기준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녀석에게 애비는 해줄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월 150만 원이라도 받고 일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 대통령 후보가 떠올랐다. ‘윤석열표 공정’은 집 앞 골목부터 진작에 실현되고 있었다. 그는 못배우고 가난한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르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아들은 부당한 조건에 맞서 일하지 않을 자유를 행사하지 못했다. 아들에게 궁핍할 자유는 필요치 않았다. 이런 아들이 요즘 말로 빡쳤다. 윤석열 후보의 부인 김건희 씨 기자회견을 보다가 “남편 한데 사과할거면 집에서나 하라고~!!”하면서 버럭했다. 안그래도 편의점 알바보다 더 벌 수 있는걸 알아보다 공장에라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 윤석열 후보가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것”이라 했다는 말을 듣고 빈정이 상했던 터였다. “허위학력이나 경력위조가 한두
1980년 5월 21일 서울 변두리 여관방, 며칠 전 광주 도청 앞 시위로 검거대상 1호로 지목된 전남대 교수 몇 사람이 피신 중이었다. TV에는 ‘폭도들이 광주를 폭도에 장악했고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뉴스가 뒤덮었다. 광주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벌써 피비린내가 진동할 때, 뉴스를 보던 송기숙 선생이 벌떡 일어섰다. “갑시다. 광주사람들이 다 죽는다는데 우리만 여기서 이럴 수는 없소. 살아있더라도 평생 부끄러운 삶일 것이오. 차라리 가서 같이 싸우고 같이 죽읍시다. 내려갑시다.” 그 길로 3명의 전남대 교수는 전라선 막차를 타고 제 발로 사지로 들어갔다. 시민수습위를 조직하고 활동하다 계엄군에 체포되어 보안사의 모진 고문을 겪어야만 했다. ‘내란죄 중요임무종사’라는 죄명이었다. 소설 ‘녹두장군’의 작가 송기숙 선생이 며칠 전 세상을 떠났다. 한 시대의 녹두꽃이 떨어졌다. 78년 서슬퍼런 유신치하에서 국민교육헌장이 ‘유신독재의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교육정책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며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하고 구속되기도 했던 선생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두 세력에 모두 맞서며 고초를 겪었다. 선생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군사쿠데타 주동
84년 즈음 한 친구가 읽어보라며 책 한 권을 건넸다. 책 제목이 ‘황강에서 북악까지’였는데 표지의 사람 얼굴이 낯익었다. 9시를 알리는 땡소리만 나면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뉴스를 시작했던 ‘땡전뉴스’의 주인공이었다. 그를 ‘전대갈’이라 부르며 이를 갈았던 우리는 지피지기라며 책을 펼쳤지만 차마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어릴 때 사과서리를 하다가 들켜서 거짓말을 했는데 이때 부끄러움 때문에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거나, 아버지가 악질순사를 강에 처박고 만주로 도망갔다면서(실상은 노름빛 때문이라는데..) ‘행패를 부리는 순사 놈을 보는 소년 두환의 주먹이 불끈’ 운운하며 시작하는데 80년대 피끓는 청춘들이 완독하기에는 보통 어려운 미션이 아니었다. 작가 천금성은 당시 권력핵심이자 서울대 농대 2년 선배인 허문도의 권유로 전기를 창작(?)했다. 문단의 평가는 혹독했으나 작가는 글을 판 댜가로 문화방송 편집위원이라는 달콤한 자리까지 거쳤다. 책 제목대로 경남 합천 황강변에서 태어나 서울 북악산까지 탱크를 몰고 접수했던 전두환이 죽었다. 그는 국민들을 자기가 통솔하던 군대의 졸로 여겼다. 오월 광주를 비롯해 수많은 청춘들이 그의 군홧발 아래 피어보지도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