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경기도 과천시 제2경인고속도로 북의왕IC 인근 방음터널에서 발생한 화재는 우리가 무심히 여기는 환경에 얼마나 끔찍한 위험 요소들이 숨어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이 뜻밖의 사고로 5명이나 되는 귀중한 생명이 스러졌다는 사실은 어이가 없다. 유사한 방음시설이 경기도에만 무려 70개가 있다니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방음터널에 대한 화재방지 공법 도입과 안전 강화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 알고도 바로 고치지 않는 것은 명백한 중죄다. 이날 오후 1시 49분께 방음터널을 지나던 한 화물 트럭에서 난 불이 방음터널 벽으로 옮겨붙으며 큰불로 번졌다. 이 불로 인해 방음터널 830m 중 600m 구간이 모두 탔다. 5명 사망 이외에도 안면부 화상 등 중상 3명, 단순 연기 흡입 등 경상 38명 등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던 사람들이 마른하늘 날벼락을 맞은 것과 다름이 없다. 이런 횡액이 나와 가족 중 누구라도 맥없이 당할 수 있는 일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경기도에서의 방음터널 내 화재 사고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20년 8월 수원 광교신도시에서 용인 구성구로 연결되는 하동IC 고가도로에 설치된 방음터널에서…
2021년에 이어 이어 지난해 두 번째로 치러진 대학입시에서 고등학교 이과 학생들이 문과계열 학과에 대거 지원한 것을 두고 ‘침공’이란 어휘까지 등장했다. 국어에서는 ‘화법과 작문’ 대신에 ‘언어와 매체’, 수학에서는 ‘확률과 통계’ 대신에 ‘미적분’을 선택한 이과출신들이 훨씬 유리한 점수로 인문계열에 지원했다는 것이다.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에서는 그 비율이 80~90%에 육박했다고 한다. 그로기 상태의 인문학에 결정타를 날리는 형국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등학교 문·이과 통합교육을 폐기해야 하나? 자기 점수를 가지고 예측할 수 있는 통계 데이터를 제공하는 등 미세하게 보완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육개혁의 차원에서 보다 근원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지난 해 수능 지원 결과를 보면, 표준점수에서 유리한 국어의 ‘언어와 매체’, 수학의 ‘미적분’ 선택 비율이 재작년에 비해 각각 4.7%포인트, 5.5%포인트 늘어났다. 재작년의 경우 문과생이 선택하는 ‘확률과 통계’가 이과생이 선택하는 ‘미적분’보다 표준점수 최고점에서 3점이나 적어 선택과목 유·불리 논란이 일어났었다. 어려운 문제에 가중치를 부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수학 경시대회 출전할 대표
유년시절은 홀로 서러웠고 혼자라서 두려웠다. 나이 든 지금 나는 다시 그 마음과 두려움으로 살고 있다. 인내와 성실과 용기만으로는 안 통하는 사회의 현실 앞에서 이제는 조금 서러워도 괜찮을 것이요. 내 운명의 주어는 ‘슬픔과 그 에너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 아침 깨끗하고 따스한 바람이 불면 어머니가 보내준 바람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정월의 따스한 햇살이 악수하듯 손목으로 내리면 먼저 간 여인의 체온 같다는 생각도 했다. 2015년 일이다. 8월 『사람과 수필 이야기』라는 수필집을 엮으면서 표지화 또한 내 필력으로 그렸다. 문인화로서 커다란 나무 아래 갓 쓰고 수염이 긴 초췌한 노인이 거목을 우러러보는 이미지의 그림이었다. 문학과 예술을 거목으로, 노인을 나 자신으로 비유한 의미화였다. 이 그림을 산뜻한 우편엽서로 만들었다. 출간한 책을 보내온 작가들에게 축하엽서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어느 날 임(林) 선생이란 분이 책 표지 그림과 엽서를 보고 느낌을 보내왔다. ‘방금 보내준 귀한 선물 잘 받았습니다. 친필 엽서의 그림은 꼭 김정희 선생 ‘세한도’를 연상하게 하였습니다. 어쩌면 추사보다 더 깊은 마음의 깊이로 다가왔습니다.’라고. 자본주
‘생각하는 언어’가 삶의 슬기, 철학적 구도(求道)의 전제조건이다. 말이 뜻을 잃거나 잊으면 그 슬기는 허망하게 망가진다. 포털에 오른 ZDNet Korea(제이디넷 코리아) 신문 12월 25일 기사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삼성 서울 서초사옥 인근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는 집회로... 집회소음이 도(道)를 넘어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침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의견이 많다. 업계에 따르면...》 업계의 ‘말’로 주민 생활을 핑계 댔다. ‘한국의 최고 권력’인 삼성이 굽어 살펴 주시기를 갈망하는 탄원서 아닌가. 머리 좋은 삼성이 어떤 속셈을 이렇게 어설프게 표현했을 리 없다. 언론도 기사도 공론(公論)이다. 기자는 공공(公共)을 위하는 자(者)다. 삼성에게도 칭찬 들을 수 없는 글이 기사로 실렸다. ‘눈치껏 하라.’는 핀잔 피할 수 없으리. 이 신문을 갈구려고 이런 서두를 꺼낸 것 아니다. 도를 넘는 무지의 언어가 ‘공론의 장’에 오르고, 누구도 이런 언어현상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 상황을 저어하는 것이다. 집회소음은, 그게 심하다면, ‘道(도)를 넘는 것’이 아니고 ‘度(도)를 넘는 것’이다. 무지(無知)를 넘어 ‘아는 체’까지도 지나쳤다. 참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이며 평등하다는 의식은 인류에게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예수께서 이 말을 하는 목적은, 모든 사람을 통합하여 국경을 초월한 형제자매로 만드는 것, 그들을 신과 합일하게 하는 것,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영원한 생명인 사랑의 계율 아래 그들을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라므네) 사회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는 새로운 관계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상대를 거의 동물로 보는 한 그들은 사람들을 동물처럼 다루는 것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고, 폭력 또는 계책을 이용해 인간을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이 하느님의 딸과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가치를 깨닫지 않는 한 새로운 관계는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채닝) 네가 두려워하는 사람도 너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는 있다. (키케로) 도덕을 얘기하면서 너희의 의무를 너희 가족과 조국의 범위 안에 한정하는 사람들은, 그 범위의 크기와 상관없이 너희에게도 타인에게도 해로운 자기애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가족과 조국은 더…
20대 초반 나이의 후배와 마포에 있는 경의선 숲길을 걸었다. 루프탑 카페가 보여 들어갔는데 이름이 ‘헤이, 쥬드’다. 주인에게 ‘헤이, 쥬드’ 노래를 청해 흐르게 하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에게 헤이, 쥬드는 프라하의 봄이야’ MZ세대인 후배, 못 알아 듣는다. 꼰대 소리 듣지 않을 선까지 내 암호같은 말을 해명한다. 영화 ‘프라하의 봄(1989 개봉작)’에 비틀즈의 노래 ‘헤이 쥬드(Hey Jude)’가 나온다. 비틀즈의 목소리가 아닌, 체코 가수 마르타 쿠비쇼바(Marta Kubisova/1942년생)가 자국어로 바꿔 불렀다. 비틀즈가 불렀을 때는 우울한 한 아이를 위한 ‘응원가’였는데 마르타 쿠비쇼바는 국민개혁가요로 바꿔 불렀다. 존 레논의 5세 장남 줄리안 레논이 자주 벌어진 부모의 싸움 때문에 어두워진 것을 본 폴 매카트니가 삼촌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 (줄리안의 애칭이 주드) 1968년, 발표되어 ‘예스터데이’와 함께 비틀즈 최고 명곡이 된 이 노래는 그해 체코 ‘프라하의 봄’ 속에서는 민중 개혁가로 퍼진다. ‘프라하의 봄’은 체코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나치 독일 점령 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게 구원이 되어준 소련은 2차 대전이 끝난 1
2022년의 아쉬움을 달래고 2023년 희망찬 시작을 알리는 새해맞이 제야의 타종행사가 2022년 12월 31일 23시 45분부터 2023년 1월 1일 0시 20분까지 수원시 행궁동 화성행궁 광장 앞 여민각에서 열렸다. 약 5천명의 시민들은 지난해를 돌아보며 새해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제야 타종에 앞서 음악공연이 열렸고 자정부터는 사랑을 만드는 사람들 봉사회에서 새해를 축하하는 뜨끈한 떡국도 나눠줘 시민들의 마음까지 푸근하게 만들었다. 2023년 새해가 밝았다. 모두 만사여의(萬事如意)하고 형통(亨通)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종교계에서도 신년사를 통해 새해 덕담과 함께 염원을 발표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은 “오늘날 지구촌 중생들 서로 간의 균열과 파열음이 곳곳에서 들려온다”면서 “창과 칼을 녹여서 호미와 보습을 만드는 일을 위해 솜씨를 모아야 할 시점” “자비와 상생을 향한 걸음걸음만이 모든 인류에게 진정한 광명이 된다”고 밝혔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대화는 평화의 필수 조건이요, 상호 존중은 대화의 필수 조건”이라면서 “우리 모두 서로 다른 생각과 입장까지도 존중하며 함께 성장하고 번영하는 정의를 추구하면서 참다
저학년 친구들은 수업 시간에 모르는 게 있어도 힘차게 손을 들고 발표한다. 발표할 때 친구들이 나를 주목하는 그 순간이 기분 좋으니까 신나서 손을 든다. 정답과 전혀 상관없이 엉뚱하게 틀린 답을 말할지라도, 그게 맞는지 틀린 지 나도 모르고 옆에 애들도 모르니까 부끄러울 게 전혀 없다. 저학년 친구들은 모두가 발표시켜달라고 애절한 눈빛을 발사한다. 어린이들은 선생님이 발표를 안 시켜줬을 때 기분이 상하지, 틀린 답을 말했다고 주눅 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닌 지 4~5년이 지나고 고학년이 되면 상황이 급변한다. 이제 아이들은 친구들이 발표하는 나를 주목하는 게 부담스럽고, 모두 앞에서 틀린 답을 말할까 봐 걱정스럽다. 나보다 공부 잘하고 많이 아는 친구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답을 말해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학생이 발표하는 빈도가 줄어들고 교사만 떠드는 조용한 교실이 되어간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발표 시간에 눈치를 보다가 결국 포기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두 과목이 있다. 범인은 영어, 수학이다. 둘 다 선행학습이 만연하기로 유명한 과목들이다. 미취학 시기에 영어 유치원이라고 이름 붙어있는 영어 학원에 다니는 건 흔한 일이고,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