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질서의 개선은 도덕적 완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내가 이렇게 붓을 들고 있는 방의 창문 밖으로, 코에 코뚜레가 꿰여 말뚝에 매어 있는 커다란 소 한 마리가 보인다. 소는 풀을 뜯어 먹다가 저도 모르게 자신이 매여 있는 고삐를 말뚝에 감아버렸다. 소담스럽게 자란 풀을 눈앞에 두고도 배를 주리고 어깨에 달라붙는 파리를 쫓기 위해 목을 흔들지도 못한 채 죄수처럼 가만히 서 있다. 그는 몇 번이나 빠져나갈 양으로 몸부림쳐보지만, 그때마다 슬픈 신음소리를 지르다가 지금은 얌전해져서 조용히 괴로워하고 있다. 엄청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이해할 만한 자각도 없이, 많은 풀 앞에서 배를 주리며 지극히 연약한 생물에게 비참하게 당하고 있는 이 소의 모습은, 내 눈에는 마치 노동자들의 상징처럼 비친다. 모든 나라에서 땀을 흘리며 풍요로운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하루하루 진보하는 문명이 새로운 사상의 분야를 개척하고 새로운 욕망을 부추기고 있을 때, 그들은 그 보잘것없는 동물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가축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은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의식하고, 마음속으로 자신들이 이런 비참한 생활을…
고르디우스 매듭은 고대 설화의 소재 중 하나로 ‘풀기 어려운 문제’를 뜻한다. 국민통합 역시 이 매듭의 범주에 들어간다. 지난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국민을 편가르기 하고 갈기갈기 찢어 놓았기 때문이다. 서슬퍼런 적폐청산의 회오리 바람 속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휘말려 들어가 남모를 고충을 겪었거나 지금도 겪고 있다. 산에 오르거나 공부에 집중하면서 섭섭함과 울분을 달랜다. 회오리 바람에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은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을 삭히고 토로하지만, 이를 이해하거나 동정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도 이들의 아픔을 더한다. 한 때는 경쟁자였거나 자기보다 잘 나가던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뒤돌아서서 엷은 미소를 짓는 것이 인간의 생리다. 그러나 한 줄기 희망을 갖는 것은 우리사회에 주역에서 말하는 ‘大人’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인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이를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묘사한다. “무릇 대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고, 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고, 사계절과 더불어 그 질서를 합하고,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을 합한다.(夫大人者 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 주역의 인간관은
정명근 화성시장 당선인이 최근 화성시장직 인수위원회 현판식과 인수위원 위촉장 수여 행사에서 화성시정연구원 설립을 제안했다. 화성시의 미래발전 비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시정연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 당선인의 생각은 옳다. 화성시는 균형발전이란 큰 숙제를 안고 있다. 또 GTX-A, GTX-C, 분당선, 신분당선, 신안산선 등 여러 노선이 동시에 진행 중이어서 교통현안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계속되는 인구 증가로 시민들이 행정서비스 측면에서 불편을 겪는 지역도 있어 분동 등 행정적 조치도 필요하다. 화성시의 시정연구원 설립 움직임은 몇 해 전부터 있었다. 서철모 시장은 지난 2020년 전국대도시시장협의회 제8차 정기회의에서 인구 100만명 미만의 도시에서도 시정연구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규제 개선을 건의했다. 진정한 지방자치 분권 실현을 위해서는 각 지역실정에 맞는 정책 연구와 개발이 필요한데 현재 ‘지방자치단체출연 연구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인구 100만 대도시만 지방연구원을 둘 수 있어 법령개선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지난 4월 지방연구원 설립 요건을 인구 100만 이상 도시에서 인구 50만 이상 도시로 낮춘 ‘지방자치단체출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여자, 남자 혼성으로 구기 종목을 하기 어려워진다. 신체 발달이 달라지면서 힘에서 여자아이들이 밀리고 치인다. 더 큰 어려움은 남자아이들은 초등학교 시절 내내 공으로 하는 운동을 접해서 발기술이나 손기술이 발달했는데, 여자아이들은 나이가 들수록 공과 점점 멀어져서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채 고학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여학생이 피지컬이나 힘에서 남자아이들과 견주었을 때 밀리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공 다루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경기 참여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체육에 자신감이 떨어진 여자아이들이 공으로 하는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게 되고, 교사조차 여학생들이 체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초중고 여자 체육은 오로지 피구와 발야구에 머무르다 끝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피구와 발야구로 점철된 학창시절이 막을 내리고 어른이 되면 보통의 여자들은 구기 종목과 완전히 멀어진 삶을 사는 게 일반적이다. 남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도 따로 운동팀을 만들어서 꾸준히 모임을 갖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여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으면서 남학생들과 함께 뛸 수 있는 종목은 없는 걸까. 조금 생소하지
남을 비난하지 않는 데는 아주 약간의 노력이면 충분하다. 남을 비난하지 않는 자의 생활은 참으로 당당하다. 그런데 그 약간의 노력을 하는 사람을 이렇게 찾아보기 힘들다니! 한 노인이 꿈속에서 생전에 결점이 많았던 수도승이 천국의 맨 윗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그 많은 결점을 가진 수도사가 가당찮게도 저렇게 큰 영예를 누리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한평생 아무도 비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면서도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바울) 남의 행위를 비난하지 말라. 남을 비난하면 공연히 자신의 마음이 어지러워져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된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반성하라. 그러면 그것은 결코 헛되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성현의 사상) 자기 스스로를 가차 없이 엄격하게 비판하면 할수록, 남을 더욱 공정하고 더욱 너그럽게 비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공자) 남의 불명예 속에서 자신의 명예를 찾지 말라. 선량한 사람은 남의 치욕을, 심지어 그에게 해를 끼친 자의 치욕까지…
김건희 여사의 행보를 두고 불필요한 시비가 오가고 있다. 야당은 “비선 실세”를 들먹이며,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의 “국정 농단 프레임”을 떠올리게 하려고 힘을 쏟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런 프레임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제2 부속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건희 여사는 영부인이기 때문에, 김 여사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고, 또한 공적 활동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김건희 여사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공격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김건희 여사의 활동이 베일에 싸일수록 이상한 말들을 만들어내며 공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공개 행보를 하더라도 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고, 집에만 있어도 음모론이 활갯짓할 가능성이 큰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럴 바엔 투명한 방식으로 공개 활동을 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판단이다. 그런데 투명한 공개 활동을 위해서는 '공적 조직'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공적 조직의 지원 없이는, 지금처럼 공개 활동에 대한 다양한 말들이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
서울민예총 주최로 광주에서 6월 1일부터 15일까지 개최된 ‘언론개혁을 위한 예술가들의 행동’ 전시회에 출품된 박찬우 작가의 작품 ‘기자 캐리캐처’를 두고 기자들이 발끈했다. 조선일보는 박찬우 작가에게 4월 8일까지 삭제할 것을 요청하면서 납득할만한 조치와 답변이 없을 때는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국일보는 ‘명예훼손 등에 따른 전시 금지 요청의 건’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기자협회는 성명서까지 냈다.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인 기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전시회를 강행하고 언론인에 대한 적대적 표현을 계속한다면 언론의 자유와 기자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한국기자협회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겁박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인 기자들이라는 표현도 웃기고, 언론의 자유와 기자들의 인권을 들먹거리는 것도 가관이다. 언론기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기는데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더욱 가관인 것은 언론의 자유를 기자들이 누리는 특권으로 오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권리이며, 기자는 뉴스라는 상품을 생산 판매하는 언론사의 종업원이다. 물론 언론이 진실보도와 공정보도로써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전제에서 그
민비의 질문, 그리고 위태로운 혁명 “경(卿)들이 지금 말하는 변란(變亂)은 청나라 측에서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일본 측에서 일으킨 것인가?” 김옥균이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고종과 민비에게 급변이 일어났으니 속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하자 민비가 날카롭게 쏘아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는데, 이는 정세의 축이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기습적인 반격이었다. 또한 외세의 위력이 주도하고 있던 현실에서 그 어떤 정변(政變)도 국제적 관계와 밀접하게 돌아가는 것을 인식한 발언이기도 했다. 거사는 이미 시작되었고 군주(君主)를 자신들의 손에 장악하는 것이 승패의 요체였는데 여기서 주춤거리면 잠시의 지체도 전체의 흐름을 끊어버릴 수 있다. 때마침 폭음(爆音)이 터지자 피신해야 할 상황이 명백해졌다. 주변에 조선 호위군이 없자 고종은 일본군이, 민비는 청군이 호위해주기를 바라는 처지였다. 이미 짜놓은 대로 일본군 출동을 위한 수순으로 들어가야 했다. 박영효가 백지를 펼쳐 들자 왕은 노상에서 김옥균이 말하는 대로 “일본공사래호짐(日本公使來護朕/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호위하라”를 쓴다. 이 칙서(勅書)는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드라마를 잘 안 본다.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화제작도 대개 한 두 번 보다가 만다. 올 봄 들어 그런 히트 드라마 두 개가 비슷한 시기에 방송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나는 여전히 끌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소문의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는 달랐다. '우리들의 블루스'. 스토리 전개의 구조, 주인공들 연기, 품고 있는 주제가 마치 장이 익어가는 것처럼 깊었다. 근래에 보기 드물게 드라마 전 편을 정주행한 것이 그 때문이다. 옴니버스 형식이다. 주제는 하나인데, 그 안에 독립된 여럿의 에피소드들이 겹쳐 있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는 (도입부 LP판에 적힌 두 개의 이름이 상징하듯) 각 스토리가 사람과 사람의 운명적 인연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독립된 에피소드를 세어보니 모두 일곱 개다. 색깔이 다른 그런 에피소드들이 하나로 모여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든 것이다. 작가는 노희경. 그녀가 쓴 드라마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들의 블루스' 하나만 놓고 보면 가히 장인에 가까운 솜씨다. 정교한 감정의 복선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이야기 전체에 심겨져있다. 주제가 선곡에서부터 흰색 크레파스로 그린 듯한 제목 모습까지 살짝 신파가 섞이기는 했다. 그런데도 쑥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