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영혼과 세속적인 행복을 동시에 돌볼 수는 없다. 세속적인 행복을 바라거든 영혼을 거부하라. 만약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 싶거든 세속적인 행복을 부정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분열만 되풀이하다 결국 하나도 얻지 못할 것이다. (에픽테토스) 사람은 선택에 따라 두 종류의 삶을 살 수 있다. 진실한 내면적인 삶과 허위의 외면적인 삶이다. 내면적인 삶은 사람이 단순히 외적인 자극과 겉모습만으로 살지 않고 모든 것 안에서 피안을, 즉 신을 보며,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신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실천적으로 발휘하여 그것을 흙 속에 묻힌 채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고골리) 의무의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적 세계의 현실성을 느끼게 하고, 그 생활에 참여케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그 세계에서 떼어놓고 우리에게 그 비현실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아미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정신적인 것, 우리가 자신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으로 의식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현실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은 모두 우리의 감각기관이 만든 것이며 따라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내 사상을 여러 사람에게 전
박근혜 정부 인수위원회가 활동하던 2013년 1월21일(월). 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로 ‘북 탈출 주민 서울정착 지원업무 탈북 공무원 간첩혐의 구속’이라고 보도했다. 다음날도 1면 머리기사로 ‘간첩 정체는 탈북자 행세한 화교였다’고 대서특필했다. 사설과 기획기사까지 이어졌다. 당시 이 사건을 동아일보에 이어 기사화한 신문은 조선일보가 유일했다. 22일자 사회면에 공안당국 발표를 인용, 간략하게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 사설에서 간첩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탈북자라고 했다. 두 신문을 빼고는 어떤 신문도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간첩 누명을 뒤집어 썼던 유우성씨는 2년 9개월만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 때문이었다. 2018년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진상위원회 재조사 후,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지난 5일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실 비서관 19명을 1차로 인선 했다. 국무총리나 장관 지명자들의 인사청문절차가 진행되는 마당이라 언론의 관심을 크게 받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간첩 조작사건의 담당 검사였던 이시원 변호사가 공직기강비서관에 임명되자 언론들은 장관급 이상의 뉴스가치를 부여했다. 아울러 9년전 간첩
윤석열 새정부가 오늘 출범했다. 국민들은 희망의 새출발을 염원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앞에 놓여 있는 국내외 환경이 너무 엄혹하다. 국내 경제는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의 3고(高)에 저성장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여기에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 급격히 불어난 국가‧가계 부채와 폭등한 부동산 문제 등은 뇌관으로 도사리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 환경이 외통수처럼 탈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소대야의 충돌 구도다. 윤석열 정부 첫 인선과 인사청문회를 둘러싸고 여야가 극단의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장관의 인사 제청권을 행사해야 할 새 국무총리 인준이 막혀있다. 국회동의를 받아야 하는 한덕수 총리 후보자의 경우 민주당이 한동훈 법무,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문제 등과 연계해 임명 동의안 표결을 늦추고 있다. 결국 윤석열 정부는 총리와 주요 장관없이 ‘반쪽 정부’로 출범하게 됐다. 글로벌 위기의 쓰나미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도 정치권은 나몰라라 하고 있다. 특히 실망스러운 것은 여야의 정치력 부재다. ‘청문회 대치·반쪽 정부’ 가능성은 3·9 대선 직후부터 어느정도 예견된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것도 역대 정부의 오랜 교훈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신정부의 외교안보분야 공약의 캐치프레이즈인 ‘당당한 외교, 튼튼한 안보’는 표면상 보기에는 괜찮다. 주권국가로서의 자주성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겠다는 결의라면 높은 점수를 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다만 그 내용에 있어 진정 실질을 추구하고 바른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재고해 봐야 할 것 같다. 과거 2008년 MB정부가 들어서던 상황이 재현될까 두려움이 앞선다. 선 비핵화 후 관계회복, 한미동맹과 확장억제 강화, 선제타격 등 주장 내용이 거의 MB정부의 주장 내용과 일치하고 더욱이 이 일의 담당 주역도 과거 MB정부의 인사들이다 보니, 금강산관광 폐쇄, 천안함, 연평도 사건 등이 떠 오른다. 당시 상황과는 크게 변한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을 감안할 때 더욱 신경이 쓰임은 나만의 걱정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금년 들어 지속적인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와 준비하고 있는 제7차 핵실험, 그리고 그들의 언동 내용의 진의를 바로 해석하면 길이 보일 것이다. 2018년의 꿈같은 시절, 북한으로서는 숙원이었던 안보 불안에서 해방되고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대통령에게 자신들 주민…
얼굴은 ‘얼의 꼴’이다. 법정 스님이 한 말이다. 얼은 넋이고 꼴은 겉모양이니, 얼굴은 넋의 겉모습인 셈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신의 줏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고들 한다. 법정 스님의 말대로라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넋에 따라 삶의 궤적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현재의 삶이 곧바로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얼굴에는 삶은 없고 정신의 줏대만 있다. 졸업논문과 연봉계약서와 등기부등본은 없고 뼈와 살과 주름만 있다. 뼈와 살과 주름을 따라서, 부딪고 보듬고 벼르는 생각의 흔적만 있다. 얼굴에는 거짓이 없다. 화장이나 성형으로도 감춰지지 않는다. 뼈를 깎고 주름을 덮어도 정신의 줏대는 바뀌지 않는다. 얼굴은 저마다 지닌 정신세계의 조감도(鳥瞰圖) 같아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눈빛에서 묻어난다. 인물 사진을 즐겨 보는 까닭도 그래서다. 그렇다고 내게 작품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앎이 얕아서 깊게 보지 못하는 나의 눈은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대신 내 눈이 쫓는 건 사진에 담긴 얼굴의 흔적이다. 눈빛과 표정과 주름에 드리워진 생각의 발자취이다. 얼굴에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업시간에 책 한 권을 느리게 읽는 슬로리딩, 혹은 온 책 읽기라는 교육 방식이 꽤 혁신적이었다. 정해진 교과 시간에 교과서 없이 수업을 진행하는 일은 교사와 아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도전적인 수업 방식이었다. 처음 우리 반에서 온 책 읽기를 진행할 때 학년 부장 선생님이 “그런 식으로 수업하면 학습 결손 생긴다.” 같은 반응을 보였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온 책 읽기의 정확한 기원이 어디인지, 누가 가장 먼저 시작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설이 있고, 한국의 몇몇 선생님들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초기에 드문드문 퍼지던 온 책 읽기는 교육과정 재구성과 결합해서 몇 년 동안 각종 교사 연수에 필수코스처럼 등장했다. 그러다 국어 교과 단원에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1년에 정해진 시간 이상은 반드시 진행해야 하는 국가 공인 교육과정이 되었다. 책을 함께 읽는 활동이 국어 교과의 필수 과정이 되면서 교사의 집단 지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온 책 읽기를 위한 책 선정에서부터, 교육과정에 맞게 재구성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 드는데 앞서 수업을 진행한 분들이 수업 자료나 피드백을 남겨
교육의 기초는 삶의 의의와 그 사명을 명백히 하는 일이 아니면 안 된다. 사람들은 법정에서의 거짓말을 범죄로 생각하고, 같은 성인들끼리 잘못된 말을 하는 것을 한심한 일로 생각하지만,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허황된 말을 지껄이고 아무리 거짓말을 하여도 잘못이 아니며 오히려 필요한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인생의 의의와 사명에 대해 설명하는 종교상의 가르침은, 천년 전의 사람들에게는 만족을 주었지만 현대인들은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린이들에게 천년 전의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이것은 무서운 잘못이다. “어린이를 교육할 때,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 것은, 어린이들에게도 모르는 것으로 가르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리히텐베르크) 이 말은 흔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듯, 어린이들에게 의심스러운 미신을 제법 근거가 있는 것처럼 믿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면 어린이들은 애매하고 어중간한 논거에 만족하는 버릇이 생겨서,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린이를 교육할 때 그들을 지나치게 힘들게 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직 인간
프랑스 고전음악의 대가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그는 어릴 적부터 바다를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바다를 선율에 담으려는 큰 야망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어느 날 일본화가 호쿠사이의 '거대한 파도'를 봤다. 이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드뷔시가 '바다(La Mer)'를 작곡하기 시작한 건 욘(Yonne).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와는 거리가 먼 육지였다. 이곳에 드뷔시가 첫발을 디딘 건 아내 릴리와 함께. 욘의 비쉔(Bichain) 마을 오두막집을 얻어 드뷔시는 대작 '바다'에 몰두했다. 이때 친구 뒤랑(Durand)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바다'를 작곡하고 있네. 만약 신의 가호가 있다면 일이 잘 진척될 걸세.” 해변의 3막은 이렇게 간절하게 부르고뉴 포도밭 비탈길에서 시작됐다. 드뷔시는 비쉔의 고요함과 자연에 반했다. 부르고뉴와 일드프랑스 접경지역인 비쉔. 이곳 들판에서 만난 선량한 마을사람들에게 드뷔시는 그만 매료됐다. 여름이면 이곳에 와 순진한 시골 사람들과 비쉔을 둘러싼 다양한 나무들을 바라봤다. '바다'의 작곡은 파리로 돌아 와 계속됐고 노르망디, 제리, 푸르빌로 이동하면서도 계속됐다. 완성된 건 3년 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