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도덕적 완성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을 향해 다가가는 것은 인생의 법칙이다. 아예 실천이 불가능하다면 처음부터 도덕률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원래 이기주의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색하고 음탕한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원래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마음속 깊이 느끼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줄 것이다. (솔티)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네가 지금 그대로의 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대답하리라. 너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가능한 한 자타의 이기심과 무관심의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를 그만두고 비록 위대하지는 않지만 청정한 영혼의 소유자가 되는 일이다. 너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영혼의 흔적이나마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 형제들이여!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내면에 영혼과 양심을 눈뜨게 하고, 우리의 게으름을 성실로, 생명 없는 돌 같은 심장을 살아 있는 그것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앞날에 기다리고 있는 무한한 선의 계열을 조금이나마 확실한 일관성
첫눈이 내렸다. 감정은 나이 들지 않는다고 하던가. 첫눈......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눈사람 되도록 걸었던 스무 살로 돌아간다. 첫눈 오면 내 어린 시절부터 청춘시절까지, 라디오와 거리의 음반가게에서 종일 틀어대던 노래, 프랑스 샹송 가수 아다모(Salvatore Adamo)의 눈이 내리네(Tombe la neige)가 환청처럼 들린다. 고등학교 불어 시간에 처음 들었던 샹송도 아다모의 그 노래였다. 팝송보다 샹송에 더 빠졌던 그때, 에펠탑 아래에 샹송을 들으며 앉아있는 꿈을 꾸곤 했다. 코르시카를 듣지 않았다면 지금도 프랑스 노래는 샹송으로만 알았을 것이다. 노래가 넘쳐나는 세상, 대개의 노래는 나뭇가지에 잠시 앉았다 뜨는 새처럼 귓가를 맴돌다 멀어진다. 그런데 심장으로 직진하는 노래가 있다. 페트루 구엘푸치(Petru Guelfucci)의 코르시카(Corsica)가 그랬다. 지중해에 떠있는 프랑스령 섬, 코르시카. 나폴레옹과 콜럼버스가 태어난 곳이며 스페인 카탈루냐처럼 분리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지엽적인 곳의 지엽적인 역사로 알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성스럽고 웅장하면서도 비애 서린 페트루 구엘푸치의 목소리를 듣고서 노래 제목이면서…
-<펜타곤 페이퍼>, 그 기만과 공화국의 위기 “거짓, 기만, 정보의 의도적 왜곡과 조작, 그리고 아예 대놓고 하는 거짓말이 정치적 목적을 이뤄내기 위한 합법적 수단이 되고 말았다. 이제 진실은 정치적 덕목이 더는 아니며,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당한 정치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쓴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의 한 대목이다. 이렇게 거짓말 정치가 팽배하는 것은 현실정치에서는 거짓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짓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보다 더 설득력있게 들리고 이성에 대한 호소력이 강력하다. 거짓말을 하는 쪽은 그걸 듣고 있는 이들이 무엇을 듣기 원하는지를 이미 잘 알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을 듣는 쪽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말을 듣기 때문에 기획된 거짓을 신뢰할 만하다고 믿어버리고 만다.” 한나 아렌트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1971년 미국의 월남전 비밀공작을 밝힌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가 폭로되면서 미국 정치의 기만이 확실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펜타곤 페이퍼>는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는 후보자의 도덕성과 정책 비전 등을 포함한 자질을 놓고 표심을 결정한다. 그리고 지역·이념·세대·계층에 따라 표가 다양하게 엇갈린다. 20대 대선이 4개월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가장 두드러진 상황 변수는 내년 3월 9일 투표일까지 감안할 때 만 2년을 넘어서는 코로나팬데믹이다. 코로나19는 모든 일상에 대변화를 강요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사적모임 금지 등을 초래했다. 경제적으로 보면 초저금리의 양적완화속에서 비대면 IT 기업이 수혜주로 급성장한 반면 전통적 제조업은 침체 국면을 맞았다. 이 같은 코로나 흐름은 4차 산업혁명으로 향하는 글로벌 저성장·저고용 경제와 맞물리며 우리 사회에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번 대선은 지역 이념 세대를 넘어 계층간 구도가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양극화 대결로 치러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선 현 정부의 최대 실정으로 꼽히고 있는 부동산값 폭등과 관련한 표의 향방이다. 시중에 풀린 양적 완화가 가세하며 치솟은 집값은 약자의 사다리를 막아섰다. ‘영끌’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에게는 좌절 그 자체였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변수가 많을수록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로…
모든 일은 그것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대처하는 것이 좋다. 큰 나무도 어린 가지에서 시작 되고, 구층탑도 작은 벽돌 한 장에서 시작되며,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다. 자신의 사상에 주의하라. 사상은 바로 행위이다. (노자) 만약 내가 피와 살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이 우리들 각자에게 내려준 육체보다 고귀한 영혼, 우리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영혼에 의해 우리 모두가 이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나는 그토록 나와 가까운 존재에게 화를 내거나 불쾌감을 느낄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창조되어 있어서, 마치 손과 손, 발과 발이 언제나 서로를 돕는 것처럼, 서로를 도와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모욕하는 이웃한테서 등을 돌리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리고 모욕을 받은 상대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본성에 반하는 일을 하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불꽃이 조용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촛대를 놓아야 한다. 바람이 불면 불꽃이 일렁거리며 어둡고 이상한 그림자를 던진다. 그러한 그림자는 너의 깨끗한 영혼의 표면에 나쁜 사상을 던져줄 것이다. (바라문의 금언) 세상의 번거로
지난 3일 《뉴욕타임스》는 ‘BTS에서 오징어게임까지’라는 제목으로 세계무대를 주름잡고 있는 한국의 문화 콘텐츠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는 한국이 세계 문화계의 ‘거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로 ‘겨울연가’에서 소녀시대로 이어져 온 짧지 않은 한류의 역사, 할리우드를 비롯한 세계적인 콘텐츠 성공 사례에 대한 빠른 벤치마킹, 급격한 사회변화에 따른 불평등 확대와 계급갈등과 같은 보편적 소재의 적절한 활용 등을 꼽았다. 그럴듯한 분석이지만 한류 성공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한국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 수준의 문화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DJ정부 등장 이후 민주화의 진전과 이에 따른 표현의 자유 등 시민 공론권 확대, 그리고 2016년 이후 촛불혁명에서 찾아야 한다. ‘한류’라는 말은 1999년 처음 등장했다. 당시 문화부는 한국 대중음악 해외 홍보를 위해 ‘한류(Song from Korea)’라는 제목의 음반을 만들어 널리 보급했다. 그 결실로 2000년 무렵 H.O.T.와 보아가 중국과 일본에서 한류 붐을 일으켰고, 이어 드라마 ‘겨울연가’(2002)와 ‘대장금’(2003), 영화 ‘살인의 추억’(2003)과 ‘올드보이’(2004)와 같은 걸작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는 두 가지 지점에서 역대 선거와 차별적 특징을 보일 것으로 생각된다. 첫 번째는 출마 후보에 대한 지지 양상이 기이하다는 점이다. 선거는 기본적으로 후보자와 그의 정책에 대한 평가 이벤트 아닌가. 그럼에도 이번의 경우 그 같은 핵심 변수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지지를 보라.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이 기본적으로 없었다고 강변하고 주 120시간 노동제를 입에 담는다. “손발 노동은 인도도 안 하고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며 육체노동을 비하하고, 없는 사람은 부정식품도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보자 자신이 대리고발 사주 의혹에 얽혀있고 가족들이 줄줄이 형사 사건에 연루되었다. 장차 퍼스트레이디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은 적나라한 논문 표절과 주가조작 의혹에 휩싸여 있다. 11월 10일에는 굳이 오지 말라는 5·18 민주묘역을 방문하여 또 사고를 쳤다. 방명록에 "5월 정신 반듯이 세우겠"다는 문장을 남긴 것이다. 이렇게 쓴 원인은 둘 중 하나다. 첫째는 '반드시'를 '반듯이'로 잘못 알고 적은 게다. 초등학생 받아쓰기에 나오는 수준의 한글 맞춤법을 모른다는 뜻이다. 둘째는 (설
극장 한 켠에서 ‘은둔형’으로 개봉중인 미국 독립영화계의 기라성 같은 인물,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 ‘퍼스트 카우’는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첫 젖소’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지 전혀 짐작하기 힘들게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 보면, '아 이런 얘기도 영화로 만들어질 수가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갖게 된다. 여기서 이런 얘기란, 말 그대로 별로 이야깃거리가 안 되는 얘기가 시나리오로 쓰여질 수 있다는 측면과 이런 이야기조차 제작과 투자가 이루어진다는 생경함 같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겨져 있다. 글쎄, 대체 어떤 투자자가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투자분이 회수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예술은 종종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용기의 결합에서 탄생한다. 투자와 제작, 연출, 촬영, 연기의 모든 면에서 이 영화 ‘퍼스트 카우’는 대단한 용기가 전제돼야 했을 것이다. 특히 연기자들이 놀랍다. 이런 얘기로 연기가 돼? ‘퍼스트 카우’는 19세기 미 북서부를 배경으로 한다. 퍼스트 카우. 그러니까 한 마을에 처음으로 젖소 한 마리가 들어 오게 되고 이 젖소의 젖을 두고 벌어지는 일종의 암투극이다. 코미디라고? 절대 코미디가 아니다. 실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