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역사학과는 대개 인문계열에 소속되어 있다. 역사학을 인문학의 범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라고 하면 문사철을 떠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학은 정말 인문학인가? 역사학자들이 인문대학 등 인문계열 소속으로 되어 있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으로써 굳어진 인식이다. 역사학을 인문학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역사에는 일관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대신에 인문학을 교양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교양인의 조건에 인문학과 예술은 필수이지만, 자연과학이 배제되는 건 우습다. 자연현상의 이치에 대해 무지하고도 교양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학자나 철학자들이 기득권 보호 차원에서 인문학을 지배계급의 넓은 교양으로 간주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는 19세기 유럽의 분위기에서 등장한 실증사학의 영향이 크다. 역사를 단순히 사실의 집적과 나열로 인식하는 것이다. 역사학의 대상은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해 모여 살게 된 이후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역사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역사학의 대상이 그러한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역사서의 대
요즘 영화 오징어 게임이 인기이다.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서로를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현실 같지 않은 현실 같은 영화에 사람들이 열광한다. 조금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게임에서 사람들은 목숨은 걸고 도박을 한다. 시작에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감독은 잘 알고 있는 듯 첫 번 째 게임에서 과반수가 무모하게 죽임을 당한다. 죽음으로 보여준 경험은 뒷사람으로 하여금 징검다리가 되고 마지막 한 사람이 독식을 하게 되는 결말이다. 고향에서 겪었던 극한 상황은 오징어 게임과 다르지 않다. 그때가 1990년대에 시작된 ‘고난의 행군’이라는 판타지가 현실로 있었던 때이다. 한 줌의 식량이 없어 주변의 사람들이 마구 죽어나가기 시작하면 살고자 하는 욕망이 더욱 커진다. 어떤 짓을 해서라도 살고자 하는 의욕이 사람들을 더욱 사악하게 만든다. 죽을 수도 있는 찰나의 행운을 노려 무시무시한 국경을 수시로 넘나들고, 고가의 골동품을 나르는 등 죄를 짓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생존 게임의 참가자가 된다. 이 시기에 게임의 설계를 자처한 상인들로부터 북방에서만 서식하는 희소한 기름개구리도 수난을 당했다. 노란색을 띠고 있어 기름개구리로 불리는데 가을이면 동면을 하려고 배가…
우리나라 방송법은 공공, 다양, 균형에 기반하여 보도, 교양, 오락에 관한 프로그램을 조화롭게 편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교양에 포함되는 다큐멘터리는 다루는 주제에 따라 다양하다. KBS인간극장, MBC인간시대 등의 휴먼다큐, 역사스페셜 등의 역사다큐, PD저널리즘을 꽃피운 시사다큐, 지리산의 4계 등의 자연다큐, EBS 하나뿐인 지구 등의 환경다큐, 인물다큐 등. 먹을 것이 부족한 시절엔 영양결핍이 문제이더니 먹을 것이 넘쳐나는 요즘에는 과잉섭취가 문제다. 모자라도 넘쳐도 다 문제다. 미디어의 다양성이 실현되어 온갖 콘텐츠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지금도 하루는 24시간이다. 지상파 3채널만이 방송하던 과거에도 하루는 24시간. 제한된 시간 속에 많은 콘텐츠를 접하면서 사람들은 눈가고 혀에 착 감기는 콘텐츠를 먼저 택한다. 어떤 경우라도 교양다큐가 드라마와 예능을 넘어설 수 없다.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동양이든 서양이든 똑같다. 다양성이 실현된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주로 오락을 택하면서 오히려 콘텐츠 소비의 다양성이 훼손되가고 있다. 편식하지 마, 게임 그만해라는 엄마의 잔소리처럼 OTT 환경에서 콘텐츠 소비의 불균형에 대한 우려가 등장하고 있다. 2020년…
누구나 다 자신은 누군가에 의해 이 세상에 부름을 받은 존재라고 믿고 있다. 죽음은 자신의 생명을 끝낼 수는 있지만, 자신의 존재를 끝내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믿음도 거기서 온 것이다. (쇼펜하우어) 영혼은 육체 속에서 자기 집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것이다. (인도의 쿠랄)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공간에서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공포에 빠뜨린다.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 사이에 있는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고,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 나아가서는 내 눈에 들어오는 공간, 내가 모르는, 그리고 또 나를 모르는, 한량없이 넓은 모든 공간에 비해 거대한 바다의 밤톨만 한 그 보잘것없는 공간을 생각하면,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내가 지금 왜 이곳에 있고 다른 곳에 있지 않은 건지 의아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바로 이 순간 저곳이 아니라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아무런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나를 이곳에 있게 했을까? 도대체 누구의 지시, 누구의 명령으로 바로 지금 바로 이곳에 있게 되었을까? 아마도 인생이란 손님이 되어 지낸 덧없는 하루의 추억과 같은 것이리라. (파스칼) 죽어야 하는 자여!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은 그리 길지 않다.
본보 18일자 9면 ‘안양시 역학조사원들, 사무실에서 컵라면으로 끼니 해결하며 고군분투’ 제하의 기사 사진을 보니 코끝이 찡하다. 안양시 만안구보건소 역학조사원들이 사무실 책상에서 컵라면과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장면이다. 먹다 만 컵라면 용기가 옆에 놓여있는 걸로 보아 식사를 미처 끝내지도 못한 채 역학조사에 열중하고 있는 듯하다. 이 사진은 최대호 안양시장의 SNS를 통해 알려졌다. 식당에 갈 시간이 없어 사무실에서 라면을 먹는 직원들의 모습에 최 시장은 “컵라면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보건소직원들의 고군분투가 눈물겹다” “허겁지겁 라면과 김밥을 먹으며 모니터에 집중하는 모습에 마음이 울컥했다”는 최시장은 역학조사원들에게 잘 차려진 식사는 호사가 돼버렸다면서 하루라도 빨리 기쁨의 점심시간을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장기화로 방역 최일선에 있는 의료진과 공직자들이 지쳐가고 있다. 점심시간조차도 허락되지 않고 매일 밤늦게까지 야근을 해야 하는 역학조사원도 마찬가지다. 역학조사원은 ‘감염병 수사관’이다. 감염병 원인과 특성을 발견해 내고 감염병유행을 차단하는 방법을 찾는 역학조사를 진행한다. 감염병 감염자와 증
그림이나 사진은 때때로 글보다 더 강력한 매체가 된다. 언론의 목적인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거나 어떤 문제에 대해 여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글보다 더 강한 이미지를 만든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림이나 사진이 기록, 교육, 권력 등에 활용된 여러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사례는 동굴벽화와 암각화이다. 인류는 글이 만들어지기 전 그림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우리나라의 울주 반구대 암각화는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무덤벽화는 사서(史書)가 기록하지 못한 풍부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사례는 종교화와 역사화이다. 유럽 중세 기독교는 히브리어 와 헬라어로 된 성경을 읽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해 성경의 내용을 전하는 방법으로 성당의 벽과 창을 조각(부조) 및 그림(모자이크화, 스테인드글라스)으로 채웠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사경(寫經)에는 반드시 불경의 내용이나 교의를 함축한 변상도(變相圖)를 맨 앞에 두었다. 이러한 그림의 교육적 활용은 중세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데, 교훈을 담은 역사화가 지속적으로 제작되는가 하면 시민혁명으로 탄생한 프랑스 혁명 정부가 루브르 궁을 세계 최초의 공공미술관으로 개방한 이유도 그림을 포
1.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전망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재집권에 대한 적신호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10월 11, 12일 한국갤럽 여론조사는 다음 선거에서 정권 교체를 원한다는 응답이 56.7퍼센트임을 알리고 있다. 민주당 정부 계속 집권을 원하는 응답은 고작 35.6퍼센트다. 우려되는 것은 중장기 추세다. 동일 조사기관의 지난 8월 조사에서 정권교체 지지 여론은 47퍼센트였다. 이 수치가 9월에 49퍼센트로 높아졌다가 10월 5일~7일 조사에서 52퍼센트로 다시 상승했다. 그러다가 엿새 만에 무려 4.7퍼센트라는 급속한 증가를 보인 것이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기관의 발표가 대동소이하다. 이런 흐름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다. 도대체 문재인 정부는 어느 지점에서부터 민심의 신뢰를 잃고 있는 건가. 사람들은 2가지를 지적한다. 첫 번째는 인사 문제요 두 번째는 부동산 폭등 문제다. 2. 홍남기 기재부 장관이 10월 8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실토를 했다. 올해 31조 5000억 원의 초과세수가 발생했다고. 2021년 본예산 편성 시점과 비교해서 무려 11.2 퍼센트에 달하는 세금을 더 걷은 게다. 장관 자리를 내걸고 재난지원금 전 국민 일괄 지원을 좌절시키면서 그가 내건…
전쟁의 모든 참화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 그것의 가장 큰 악의 하나는 인간의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는 것이다. 군대가 존재하고 군사비가 지출되는 것을 어떻게든 설명해야 하는데,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이성이 비뚤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강 건너편에 살고 있고, 그의 황제가 내 황제와 싸우고 있다는 이유로 그와 나 사이에 무슨 나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에게 나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얘기가 또 있을까? (파스칼) 사람들이 전쟁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4세기 전에 피사와 루카의 주민들은 서로 맹렬하게 미워했는데, 마치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피사의 짐꾼까지도 신분이 높은 루카 시민에게 뭔가 신세를 지는 것을 피사에 대한 수치스러운 배신이라고 여겼다. 지금 그 적개심의 흔적이 어디엔가 남아 있을까? 마찬가지로 현재의 프러시아인의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에는 장차 무엇이 남을까? 그러한 감정이 장차 우리의 자손에게, 마치 아테네인의 스파르타인에 대한 증오심이나 피사의 주민의 루카 주민에 대한 증오심과 마찬가지로 보일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다. 사람들은 이윽고 자신들에게는 서
-연예뉴스로만 소비되는 <오징어 게임>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넷플릭스에 올라 세계적 유명세를 발휘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단지 화젯거리 연예 뉴스로만 소비되고 있는 중이다. 정작 이 드라마는 엄청난 정치사회적 메스를 우리 사회의 목덜미에 예리하게 들이대고 있는데 그런 건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야만을 찔러댄 영화가 자본주의의 문화통치에 빨려 들어가 버린 꼴이다. 영화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는데 현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걸 오락처럼 즐기고 있다. 자본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는 언론들은 ‘뽑기’로도 불리는 ‘달고나’가 어디에서 얼마나 팔리는지를 궁금하게 만들고 있으며, 외국인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열심히 따라 하고 있는 장면을 호기심거리로 제공하는 작업에 몰두할 뿐이다. 이 영화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비극, 벼랑 끝에 몰린 빈곤의 현장과 그 비명소리는 철저하게 외면한다. <오징어 게임>에서 보여주고 있는 갖가지 게임은 아이들의 놀이를 모방했다. 그러나 그건 그냥 놀이가 아니라 생존투쟁이다. 여기서 승패는 곧 생사의 문제가 된다. 죽음은 정확하게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