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결정됨에 따라 내년 3월 9일 치러지는 대선의 대진표가 사실상 확정됐다. 주요 정당으로 보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함께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다. 여기에 가칭 ‘새로운물결’의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등이 있다. 국민들은 이제 4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이 인물과 정책 대결로 대선의 격을 높이는 축제의 장이 되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 대선은 이런 기대와는 정반대의 선거로 전개되지 않을까 우려가 앞서는 게 사실이다. 먼저 후보 경선이 끝난 민주당은 최종 후보 선출과정에서 불거진 경선 불복 논란이 외형적으로는 봉합된 상황이지만 일부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주에 끝난 국민의힘 경선은 민심과 당심이 충돌한 끝에 결국 당심으로 판이 가려지며 파장을 낳고 있다. 우선 최종 경선에서 2위로 탈락한 홍준표 후보에 압도적 지지를 보낸 2030 세대를 중심으로 탈당과 지지세 이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역대 경선을 보면 당심이 민심에 수렴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이번 국민의힘 경선은 당원들에 대한 장악력이 높은 의원과 당협위원장이 대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라는 작품이 있다. 와카타케 지사코가 쓴 소설도 있고 오키타 슈이치가 만든 영화도 있다. 75세 노년 여성 모모코가 홀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고독하다. 한편으로는 고독을 즐기는 것도 같지만 속살을 보면 고통의 나날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 여성은 55세에 남편이 죽자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 혼자가 됐다.’ 그러나 그 이후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하며 산다. 거의가 다 독백이다. ‘오늘도 세 시간을 기다려 1분 진료를 했다’라든가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가상의, 허구의 인물이 늘 머리맡에서 자기에게 말을 건다. ‘그냥 더 누워 있어. 일어나 봐야 별다른 일도 없잖아?’ 하지만 이 ‘노친네’ 모모코는 굳이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의 무심하고 무례한 병원 진료를 보는 일과 같은 루틴의 일상을 시작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를 보고 있으면 노년의 삶이 지녀야 할 의지 같은 것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하게 파편화된, 고립된 개인만의 삶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 노년층들, 더 나아가 일본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일본사
우리의 생명의식과 신의 관계는 우리의 감성과 세계 또는 사물과의 관계와 같다. 감성이 없으면 우리는 세계와 사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생명의 의식이 없으면 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신을 섬기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고 이성이 주는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자유의사를 가지면서도 역시 정의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신이다. 대체로 우리의 마음이 신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 인식을 이성에 전달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어려운 일이다. 또 과연 이성은 마음 없이 저 혼자 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이 신을 인식해야 이성이 그것을 탐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리히텐베르크) 신의 이념은 확실히 위대하지만, 그것은 결국 무한하게 정화되고 무한하게 높여진 우리의 정신적 자질의 이념이다. 신성 이념의 기초는 우리의 내부에 있다. (채닝) 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더 좋은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엔젤리스 실리시어스)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와 화해 정착을 위한 노력을 요청하고 북한을 방문해줄 것을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에는 유엔 기조연설을 통해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종전선언 추진상황을 설명하고 회원국들의 적극적 지지와 협조를 구했다. 이를 위해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을 미국에 보내 한반도 정책 관계자들을 만나 종전선언의 당위성을 설득하도록 하기도 했다. 임기 말 문재인 정부의 남북 평화정착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평가할 만하다. 돌이켜 보면 한반도의 분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 미국이 주도한 것이다. 분단이 운명이라면 마땅히 전범국가 일본이 그 짐을 지어야 했음에도 미국 등 강대국은 한반도에 그 업보를 뒤집어씌운 셈이다. 미국은 일제 강점기 친일 민족반역자 집단을 재기용함으로써 민족 내부의 갈등을 촉발하고 급기야 동족상잔의 전쟁에 이르게 했다. 이 죄업은 두고두고 미국이 갚아야 할 역사적 책무를 상기시킨다. 또한 미국은 군정을 통해 민족 내부에서 일어났던 정당한 단독정부 반대운동을 유혈 진압(4·3 사건)했을 뿐 아니라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남북 협상을 방해함으로써 민족국가 형성과 평화 정착 노력을 초기부터 깨트린…
102회 전국체전이 코로나19 영향으로 고등부만 개최되는 아쉬운 상황에서 경기도는 선수들의 고군분투에 힘입어 전체 메달 수 선두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마감했다. 갈수록 줄어드는 옅은 학생 선수층 속에서도 경기도 소속으로서 훌륭한 성적을 낸 선수들과 코치진 그리고 운영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와 뜨거운 갈채를 보낸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올림픽을 앞두고 들끓는 국내 정서와 국제 위상 제고를 위해 정부는 주최국으로서 좋은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취지 아래 80년대 초기부터 올림픽 메달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각 종목 유망주들을 집중적으로 육성시키기 시작했다. 정부는 올림픽 개최 6~7년이 남은 시점 운동신경과 체격조건이 남다른 초·중학생들을 중심으로 올림픽 꿈나무를 선발했고, 바로 그 유망주들을 우리는 ‘88꿈나무’라고 호칭했다. 사상 최초로 올림픽 2관왕에 오른 양궁 김수녕 선수를 비롯해 많은 ‘88꿈나무’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국위선양은 물론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중흥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금번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의 한국 선수단의 성적은 메달 총계가 1984년 LA올림픽 수준으로 후퇴했고, 양궁을 제외하면 금
“우리는 깐부잖아. 깐부끼리는 네 것, 내 것이 없는 거야.”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오징어 게임’ 속 대사다.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니 ‘깐부’(같은 편)라는 단어도 덩달아 유행어가 됐다. ‘깜보’? ‘깐부’? 뭐라고 불렀는지 헷갈리지만, 코흘리개 시절 나 역시 공터에서 구슬이나 딱지치기를 하며 동네 또래들과 깐부를 맺었다. 깐부를 왜 맺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추측컨대 그 친구와 친해서였기도 했고, 친구의 깐부라는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 어린 시절에도 나에게 같은 편이 있다는 게 얼마나 듬직한 일인지, 본능적으로 알았던 게 아닌가 싶다. 깐부의 취지는 ‘경제적 일심동체’였다. ‘개인 소유’는 없었고, ‘공동 소유’였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정말 그랬었나 싶다. 시작할 때는 ‘네 것, 내 것’ 없이 ‘우리 것’이라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늘 누군가는 손해 보는 공정치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깐부’라는 이유로 불평도 못 했다. ‘깐부’ 사이에서도 힘의 불균형은 분명히 있었다. 누군가는 더 가졌고, 누군가는 잃었다. 어떤 식으로 포장하든, 드라마 속 기훈(이정재 분)은 구슬을 가진 자가, 일남(오영수 분) 할아버지
-비르투스와 포르투나 ‘비르투스(Virtus)’라는 라틴어는 ‘미덕(美德)’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virtue’의 뿌리가 되는 말이다. 전쟁을 통해 국가의 힘을 확장했던 고대 로마에서 비르투스는 우선 전사(戰士)의 주력부대일 수 밖에 없는 남성들의 “용기”를 뜻했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에 대한 용기였을까? <로마사 논고(論考)>를 쓴 마키아벨리는 역사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군주론>을 썼는데 그가 돌파하려 했던 것은 “운명”이었다. ‘포르투나(fortuna)’라고 불린 운명은 이미 신에 의해 정해진 경로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를 말하는 것이었고, 용기는 이와 대결해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역사를 스스로의 힘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는 ‘자질(qualita)’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따라서 바로 이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제왕학(帝王學)이었다. 1469년에 태어나 1527년에 세상을 떠난 그가 살았던 당대의 이탈리아는 외세에 휘둘려 분열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민중들의 삶은 따라서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고 재난이 겹치면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한 폭정”에 시달렸다. 그러니 이탈리아의 독립과 그에…
지금 내 손에 들려 잠 못 들게 하는 책은 ‘세 여자’다. 작가 조선희는 잊혀진 여성독립투사 허정숙, 고명자, 주세죽 세 여자의 일대기를 소설 형식으로 되살려 놓았다. 2017년 나온 책을 읽은 이들은 ‘3년 전 화제가 됐을 때 안 읽고 왜 이제야?’ 하고 물을 수 있겠다. 그에 대한 답이 오늘 글의 주제다. 작가에게 미안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녀의 전작들을 제목만 보고 내 스타일이 아니라 고 지레짐작, 독서목록에서 제외시켰었다. 또 그 기억으로 ‘세 여자’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내 독서모임 다음 책이 ‘세 여자’로 선정돼 내 의지 없이 잡게 된 것이다. 소설은 나를 단박 100년 전, 역사의 격변 속에 떨구었고 세 여자의 파란만장한 운명의 회오리에 휘몰리게 했고 이틀 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었다. 근거 부실한 순간 감정의 선입견을 반성한다. 그 같은 선입견으로 놓친 음악이 얼마나 많았을까. 뒤늦게 듣기 시작한 그리스 출신 미국 작곡가 야니(본명 야니스 흐리소말리스 Yannis Hrysomallis)와의 만남도 그랬다. 음악광 친구와 대화하다 ‘왜 야니 음악에 관심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들었다. ‘전자음악 쓰는 뉴에이지 음악가잖아. 몇 곡 들어봤는데 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해서 떠날 거라 했다. 서른세 살에는 미치지 않으면 자살하게 될 운명이라 했다. 인도 뉴델리 파하르간즈 골목에서 만난 예언자라는 이의 말이었다. 스무 해 전, 나는 한국을 떠났다. 중국에서 터키까지 두 해에 걸쳐 길 위에서의 삶을 살았다. 사랑하던 이를 잃고 힘겨운 마음으로 견디던 여정(旅程)이었다. 그 한 복판에서 듣게 된 끔찍한 예언이었다. 탁류(濁流)에 휩쓸려 깊고 어두운 강 아래로 내가 가라앉는 일시정지 화면이었다. 화가 치밀어 좌충우돌 목적지도 없이 버스를 탔다.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못했다. 사흘 밤낮 의자에 꼿꼿이 앉아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러다 도착한 곳이 히말라야 산맥 해발 2천 미터 고도에 위치한 마날리였다. 해가 저물기도 전인데 버스는 끊겼다.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묵어야 했다. 더군다나 알고 보니 온천 마을.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않는 자학 프로그램”이 버스 끊긴 산속 온천 마을에서 자동 종료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고행을 이어가기로 했다. 무작정 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며칠을 굶어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사과나무의 탐스러운 열매에 눈길조차 주지 않을 만큼 가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