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미문의 시대적 전환기에 올해와 내년 큰 선거가 잇따라 예정돼 있다. 4월7일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내년에는 대선, 지방선거가 실시된다. 모든 일상을 코로나의 블랙홀에 빼앗기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홀로 광야에 서 있는 모습이 우리 국민들의 현주소다. 그래서 목마름으로 백마타고 오는 초인(超人)을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계절이다. 서울·부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여야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출사표를 던지거나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야권에서는 대선급 주자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도전장을 내밀며 서울시장 선거의 판이 커졌다. 특히 이번 선거는 전직 단체장들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막대한 국민혈세가 추가로 투입되는 등 엄중한 상황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올해부터 내년까지 이어지는 선거는 오랫동안 우리정치를 감싸고 있는 누더기 옷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미래를 여는 희망의 출발선이 돼야 한다. 이를위해 후보를 내는 정당이나 출마자들, 그리고 유권자 모두 비상한 각오와 비전을 갖고 임해야 한다. 2000년대 이후 이명박(2002년~)·오세훈(2006년~)·박원순(2011년~) 역대 서울시장을 보라. 출발이 얼마나 화려했나. 모두 시장직에 오르자마자 대권 후보 반열로 기대
나는 경기도 파주에 산다. 가끔 차를 타고 지나다가 이런저런 플래카드를 보게 된다. 거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구가 있는데 바로 “결사반대” 다. 무슨 화장터, 무슨 특수학교, 무슨 공장 뒤에는 어김없이 “결사” 반대란다. 뭐 반대하는 것이야 민주사회에서 정당한 의사표시니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조금 유감인 점은 “결사”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정말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의 무게를 아는 것일까? 진정으로 목숨을 걸어본 적이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90년대 초반, 나는 ‘행남사’라는 공장에서 노조활동을 하다가 해고되었다. 93년 봄, 전국의 해고자들이 모여 ‘전해투’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전국을 돌며 복직투쟁을 할 때의 일이다. 노동청 점거농성을 했는데 청장이 면담에 응하지 않자 노동청 창문 난간에 매달려 투신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3층인가? 4층인가? 막상 유리 창문을 열고 난간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떨어지면 진짜 죽을 것 같았다. 겁이 덜컥 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른 동지들은 벌써 난간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비겁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죽
양평 용문사에는 은행나무가 있다. 추정나이 1100년, 높이 42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14m, 가지너비가 동서로 28.1m, 남북으로 28.4m라는 숫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은행나무를 처음 마주했던 순간의 인상을 잊을 수 없다. 그 나무, 아니 그녀(암나무이다)는 나에게 동양최대라는 거대한 자태로 힘찬 가지와 무성한 은행잎을 휘날리며 지나온 1100년의 시간을 문자가 아닌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녀 나이의 두 배가 넘는 기간 전부터 여러 민족과 애환을 함께 했던 불교는 2500년 전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 호흡을 통해서 지혜를 개발한 붓다의 한 숨결에서 시작되었다. 그 모습은 초기불교서적인 (맛지마니까야:들숨날숨기억경)에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기억을 확립하여 앉는다. 기억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기억하면서 숨을 내쉰다.’로 시작되는 설명에서 호흡을 의식의 중심에 두고 관찰함으로 고요한 호흡과 삼매에 도달하는 방법을 전한다. 2200년전의 가장 오래된 한의학 서적인 황제내경에서는 양생 즉,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호흡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건강한 상태에서는 호흡이 고요하면서 가늘면서 천천히 이루어지고 들숨날숨비율이 적절한 호흡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십만 원 없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생, 그 딸 “아버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둑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슨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 오래 가슴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 이영춘 약력 『월간문학』(1976) 등단. 시집 [노자의 무덤을 가다] [따뜻한 편지] [들풀] 외 다수. 수상 고산(윤선도)문학대상, 유심작품상특별상, 천상병귀천문학대상, 김삿갓문학상 등
‘코로나 19 시대 인간 본질 탐구 보도 필요하다.’ 《미디어 오늘》 1281호(2020년 12월 23일자) 사설 제목이다. 고려대 미디어학부 박재영 교수의 “사건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인물이 있고, 인물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인간의 본질이 나온다.” 라는 글에서 영감을 받은 제안이다. 여기서 본질이라는 것은 물질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substance)을 따지자면 주기율표에 기록된 원소들 중에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을 상기하게 된다. 이 원소들은 모두 별의 잔해들이다. 이런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는 본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인간 본성(nature)의 탐구 말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일단 제안을 수정하기로 한다. 코로나 시대와 관계없이 언론 보도에서는 인간 본성의 탐구가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지만, 기자도 인간 본성의 탐구가 필요하다. 그래야 흥미 본위의 사건 중심이 아니라 사람 냄새가 나는 보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돈오돈수의 깨달음도 아니고, 사건의 인물을 아무리 들여다본들 인간의 본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타고난 것인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인가? 사회과학 연구자
지난해 12월 5일은 리영희 선생(1929-2010) 10주기였다. 리영희 재단 등에서는 몇 차례 추모세미나를 열었고, 창비출판사에서는 새로운 《리영희 평전》과 《리영희선집》을 펴냈다. 추모 논술대회나 글쓰기 공모전도 열렸고, 리영희상 시상식도 이어졌다. 리영희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독립언론 ‘뉴스타파’에서는 《다큐 리영희》 5부작을 제작하여 공개했다. 리영희선생 관련한 일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리선생을 추모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리선생을 다시 소환하는 동력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이고, 시민의 열망이다. 리영희를 통해 검찰(법조)과 언론, 재벌과 제국주의로 이어지는 한국 지배 권력의 본질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고, 동시에 한국사회의 근본적 개혁방향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리선생은 언론사 기자로 지낸 10여년을 포함하여 평생을 정론직필의 투사로 살았다. 반공주의와 파시즘체제, 베트남전쟁과 중국사회주의, 6·25전쟁과 미제국주의, 친일파와 일본군국주의, 분단체제와 통일, 수구권력과 언론매체 등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모든 ‘우상’의 본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 군부정권은 물리적 탄압으로 응답했다. 언론사와 대학은 리선생을 내쫓았고, 검찰은 체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