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기본개념이 ‘거주’에서 ‘투자’로 바뀐 세월이 짧지 않은 나라에서 주택을 둘러싼 새로운 ‘흑백’ 논리, ‘선악’ 편견의 포퓰리즘이 판을 치고 있다. 정치권이 나서서 은연중에 1주택이나 무주택자는 선(善)이고, 2주택 이상 다주택자는 악(惡)이라는 이미지를 떡칠하는 데 여념이 없다. 노출되지 않는 천문학적 현금이나 주식 부자는 용서해줄 만하고, 두 채 이상 집을 가진 ‘집 부자’는 용서 못 할 파렴치한으로 몰아가는 이율배반적 여론재판이 판을 친다. 우리 사회에서 집은 ‘얼마나 빨리 소유하고, 어떻게 부의 축적과 확장으로 연결해 나가느냐’는 개념의, 이른바 퀘스트(Quest·온라인 게임에서 이용자가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임무 또는 행동)로 존재한다는 해석이 있다. 집 평수를 더 늘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최종 퀘스트는 집의 자가 증식을 추구하는 ‘투자’ 단계로 나아간다. 투자수익률로는 부동산을 따라갈 재테크 종목이 없는 이상한 나라의 불행한 사이클이다. 자기 팬티 끈 끊어진 줄 모르고(또는 숨기고) 상대방을 향해 주먹질에 열중하다가 곱빼기 망신을 당하는 인사들이 늘고 있다. 스스로가 다주택자이면서 다른 편 다주택자들을 골라 시시콜콜 물어뜯
꽃이 지고서야 문득 꽃을 보네/ 네가 떠난 뒤에 비로소 널 만났듯 / 향기만 남은 하루가/ 천년 같은 이 봄날(민병도의 낙화)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양연화는 그때가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마련이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추억하기에 화양연화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아련히 살아있다. 잠시라도 내가 인생에 태어난 이유며 살아있음을 기억하는 의미있는 순간으로 말이다. 풋풋했던 20대 88올림픽이 열리던 해. 세계 석학들을 초청한 심포지엄 일로 한 친구를 만났다. 이후 줄곧 우리는 서로 의지하는 둘도 없는 친구로 살고 있다. 세월이 훌쩍 지나 직장을 그만두고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고 용기를 못 내던 친구가 최근 박사가 됐다. 그가 공부를 망설일 때 나는 강력하게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가 석사 학위를 받고 나서도 나는 그의 등을 또 밀었다. 늦었다하더라도 넌 공부하는 걸 좋아하므로 박사까지 마쳐야 한다고. 그러나 그의 박사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검은 머리는 새하얗게 되었고 눈은 침침해 두꺼운 돋보기를 쓰고서도 줄줄 눈물을 흘리며 공부를 이어가다가 결국 아파서 119에 실려 가기도 하였다. 그가 그 힘든 과정을 다
어느 장터에서 장사꾼이 장사를 시작했다. 이 창으로 뚫지 못할 방패가 없다. 잠시 후에 둥근 방패를 들고 나왔다. 이 방패로 막지 못할 무기가 없다. 창이든 칼이든 다 막아내는 튼튼한 방패라는 것이다. 그러자 구경꾼 중 한 명이 그럼 세상에 뚫지 못할 것이 없는 이 창으로 세상에서 막지 못할,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방패와 겨뤄보면 어떠하겠는가 제안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듣고 보니 말하고 보니 참으로 모순된 일이기 때문이다. 矛盾(모순)이다. 矛(창모)盾(방패순). 어처구니가 없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했다. 당시 6세였던 김익순의 손자 김병연은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조부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고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공무원이 일을 열심히 해야할 부서가 있고 적절하게 근무할 부서가 있는 것 같다. 기획부서, 예산부서,…
지난 2017년 5월 27일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선감학원 묘역과 경기창작센터 일대에서 선감학원 희생자 공식 위령제와 추모문화제가 열린 바 있다. 이 자리에는 이곳에 수용됐다가 탈출, 승려가 된 혜법 스님도 참석했다. 8살 때인 1969년 밖에서 놀다가 잡혀왔다고 했다. 가족은 아버지와 한쪽다리를 절던 어머니, 형 2명, 누나 1명이 있었고 잡혀가던 그날 엄마가 쌍둥이 동생을 출산했다는 당시 기억을 갖고 있다. 수원 집에서 성곽이 보였고, 근처에 저수지가 있었다. 문둥이 마을도 있었던 기억이 있고, 동네 학교가 산위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혜법스님은 선감학원에서의 아픔과 복수의 마음을 잊기 위해 출가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수원시가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적극 나섰다. 기록물 전수조사와 홍보, 노인대상 집중 탐문 활동을 펼쳤지만 아직 찾았다는 소식이 없어 안타깝다. 이처럼 선감학원 피해자들의 한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국가의 잘못으로 혹독한 고통을 당해온 피해자들의 눈물을 우리는 아직도 닦아주지 못하고 있다. 본보의 기획기사 ‘경기도의 굴곡진 현대사-안산 선감학원’(7월31자 1면)는 선감학원이 문을 닫은 지 30년이 넘었지만 생존 선감학원
오늘은 야간진료다. 누군가 화사하게 인사한다. “원장님 계속 치료 많이 받고 싶었는데 일이 너무 늦게 끝나고 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계속 못왔어요”. 요즘 어떠냐는 질문에 “잘 지내요 호호호.”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이쁘다. 문득 그녀가 처음 내원했을 때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힘들게 약속을 몇 번이나 바꿔가며 진료실에서 만나 연변 사투리로 꺼내놓는 증상들이 심상치 않다. 자신의 몸에서 고름 냄새가 나고 직장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하고 욕하고 수군거리고 쳐다보고 또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쫓아온다고 하였다. 검사가 필요해 대기실에 기다리라고 하는 사이 하필이면 그때 불시에 방문한 타업체의 남자직원이 방문하였다. 그녀는 저 사람이 자신을 쫓아왔다고 말하며 다음에 오겠다고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나는 소개한 분의 염려를 떠올리며 그녀에게 세심한 관심과 치료가 필요함을 전화로 알렸고 이어 연결되어 딸의 상황을 들은 그녀의 엄마는 자신이 잘 챙기겠노라고 다짐하였다. 그 일을 잊어버릴 때 쯤 그녀는 엄마와 함께 내원하였다. 처음 내원시 증상과 함께 소화불량, 과민성대장증후군, 불면, 통증 등 증상이 한보따리다. 화병과 중증도의 우울과 불안을 보인다.화병은 대게
# 이진희의 청강을 거부하는 스에마쓰 야스카즈 쓰다 소키치와 이케우치 히로시는 이병도가 와세다대를 졸업한 후에도 자신들의 저서와 논문을 보내주었다. 이병도는 남한 강단사학계의 이른바 태두가 된 후에도 이 일본인 학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매우 존경할만한 인격자였다”고 높였다(본 연재 7월 20일자 참조) 또한 경성제대 교수이자 조선사편수회 간사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해방 후에도 한국을 들락거리면서 서울대 교수들을 지도했으며(27일자 참조) 한국인 제자들에게 이렇게 친절했던 식민사학자지만 재일 사학자 이진희(李進熙:1929~2012) 교수가 자서전 ‘해협’에서 말하는 이들의 모습은 아주 다르다. 이진희는 1950년 메이지(明治)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는데, 6·25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53년 도쿄예술대학 교수인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가 케이오대학(慶應大學)에서 ‘조선고고학’을 강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학습원대학(學習院大學)의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도쿄대학에서 ‘여말선초(麗末鮮初:고려말 조선초)’라는 제목으로 강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진희는 후지타 료사쿠의 ‘조선고고학’을 듣기 위해서 후지타의 친구인 고토 슈이
코로나19로 인해 배달 서비스를 주도적으로 영위하는 계층을 홈(Home)족 이라 부른다. 코로나19 창궐도 이유지만 스스로 집에서 삶을 즐긴다. 사회생활에 부적응으로 집밖을 두려워하는 ‘방콕족’과는 구별된다. 집을 일상의 생활공간으로 꾸미는 ‘홈스케이프(Home+Escape)’, 집에서 휴가를 보내는 ‘홈캉스(Home+Vacance)’, 카페처럼 집을 만드는 ‘홈카페’, 예능인이 방송에서 보여준 ‘나래바’ 그리고 코로나19 침체속 급성장한 출장 청소.세탁.방문수거 서비스도 이들 홈족이 주도한다. 여기에 홈트레이닝도 그 중 하나다. 여러 사람이 밀집해서 체취와 체액이 곳곳에 묻어있고 밀폐된 공간인 헬스장을 피하려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모 스타트업 온라인 PT 프로그램은 수강 신청이 급증한 것은 안전하게 운동하고 싶은 단면을 보여준다. 이처럼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한 공포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에서만 지내는 ‘홈족’이 증가하고 있다. 반면 이들 중 상당수가 은둔형 외톨이로 진행된다는 우려섞인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때 슬기로운 홈족 생활로, 그리고 홈족 생활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으며 가파른 확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가슴기 살균제 피해 규모가 당초 발표된 것보다 훨씬 크다는 소식에 충격에 휩싸인 하루였다. 뉴스를 듣는 순간 가슴기 살균제 사건이 터졌던 그때 나는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볼 수밖에 없었다. 가습기는 쓰고 있었으나 다행히 살균제를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무실이나 공공공간에서 가습기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니 나 또한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몇 년 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는 사람은 필자 뿐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측하지 못했던 재난이 너무나 자주 우리 삶에 찾아오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운 나날인데 홍수 피해나 가습기 살균제 소식은 어느 때보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다. 세상은 빨리 변하고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는 상품들은 즐비하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자 만든 장치와 물건들이 오히려 우리들의 삶을 위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오늘은 손때 묻은 할머니의 장롱과 같이 우리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작품 두 가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조혜진의 개인전 ‘한 겹 Blurry layer’은 올해 초 통인보안여관에서 열렸다. 그는 자개농의 문짝을…
나, 거기에 있었다 박 남 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책장 한구석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점점 색이 바래고 먼지가 켜켜이 앉아 본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기억조차 없고 이제 그만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하나 마음을 조였다 풀었다 하는 사이 해와 달은 수없이 떴다 지고 바람은 제멋대로 들락날락하고 문득 코끝 간지럽히는 초록향기에 몸은 허공에 둥실~ 나, 그만 마음을 활짝 열어버렸다. 박남주 1955년 서울 출생.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단오부채』, 『중심은 사랑이다』가 있다. 시랑 동인.
지금 어떤 음악을 듣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답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인의 취향이 매우 확고하여 한 장르의 음악만 고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고, 또 누군가는 조금 더 큰 카테고리 안에서 유연하게 음악을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몇 해 전까지는 힙합 음악이 그리고 요즘처럼 트로트 음악이 사정없이 울릴 때면,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당시 유행하는 음악을 저항 없이 듣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 본다. 몇 해 전 무한도전의 ‘토토가’ 열풍이 불었다. 연일 그 프로그램에 관한 기사의 링크와 시청 소감 그리고 추억담을 이야기하느라, 사람들의 SNS 타임라인은 꽤 분주했다. 한 세대 전의 음악이 전국의 거리에 흘러나왔고, 나이로 볼 때, 그 당시의 문화를 향유하지 못했을 법한 연령대의 친구들이 그 노래들을 흥얼거렸다. 이 현상은 프로그램의 기획력과 파급력만으로 치부하기에는 상당히 강력했으며, 드라마나 가요의 복고 혹은 레트로의 열풍이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 예견했던 당시의 분위기에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얼마 전 음원 발매와 함께 차트를 점령한 ‘싹쓰리’ 역시 결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는데, ‘토토가’의 킬링 포인트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