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오늘 제3차 남북적십자 회담이 평양의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제2차 서울 회담이 열린 지 41일 만에 다시 열린 제3차 회담이었다. 회담은 이범석 대한적십자사 대표의 기조연설로 시작됐다. 하지만 제3차 남북적십자회담은 북한 측이 의제에도 없는 남한 법 체제의 개정과 정비를 요구함으로써 아무런 성과 없이 끝이 났다.
우리나라 제2대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선생이 1964년 오늘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고인의 장례식은 엿새 뒤인 10월 30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엄수했다. 고 함태영 선생은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뒤 한국신학대학장 등을 지내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부통령 후보자로 추천돼 정계에 진출했다.
나의 시간은 여전히 대치선 위에서 떨고 있다 밤새 쏟아져내리다 바람에 휩쓸려 꽁꽁 언 채로 새벽의 골목 한구석에 몰려 있는 눈더미 속에 있다 수당 몇푼을 찔러넣고 길 위에 서 본 사람은 알지 허공에 하얗게 얼어붙은 해가 가슴 속에서 어떻게 뜨거워지는지, 골목에서 눈물을 훔치던 길이 어디로 뻗어가는지 지금은 제 죽음의 밑바닥까지 보아버린 어두움이 스스로 피를 흘리는 시간 한줄기 새벽 노을에 길이 대치선 위로 숨을 틔우고 있다 시간의 흔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가 많다. ‘지금’이라는 시간도 이미 ‘과거’로 사라진다. 무수한 망설임과 상처로 얼룩진 ‘길’이라는 시간 속에서 시인은 어둡다. 하루치의 “수당 몇푼”으로 “봉지 김치”에 “라면 밥”을 말아 먹는 가난한 시인의 뒷모습이 떠올려진다. 생존이라는 대치선과의 투쟁에서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시간이 숨을 틔우는 ‘순간’이 온기로 충만했으면 하는 계절이다. 누구나 가슴 따뜻한 나날이었으면 하는 늦가을이다. /
1962년 오늘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소련이 서반구에 대한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쿠바에 건설 중”이라며 “쿠바에서 핵무기가 발사될 경우 이를 소련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미국도 핵무기로 대응하겠다”고 경고한다. 케네디는 이와 함께 쿠바를 둘러싼 해상 926㎞를 무력으로 봉쇄한다고 선언한다. 핵전쟁과 함께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우려되는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진 것이다.
1967년 오늘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대규모 반전 시위가 벌어진다.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링컨 메모리얼(Lincoln Memorial) 건물 앞에 모여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비난한다. 시위대는 링컨 메모리얼에서 집회를 끝내고 국방부 건물로 행진했다. 이 과정에서 무장한 군인들과 충돌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한다. 하루 전 21일부터 시작된 이 반전시위는 23일까지 사흘 동안 계속됐다. 이 기간에 모두 683명이 체포됐다. 이 같은 반전시위는 일본과 서부유럽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전개됐다. 이후 고엽제 살포, 양민학살 등 베트남전쟁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반전시위의 물결은 더욱 거세진다.
가난한 아버지가 가련한 아들을 껴안고 잠든 밤 마른 이불과 따끈따끈한 요리를 꿈꾸며 잠든 밤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껴안고 잠든 밤 소금 같은 싸락눈이 신문지 갈피를 넘기며 염장을 지르는, 지하역의 겨울밤 /박후기 - 글발 한국시인축구단 공동시집 ‘토요일이면 지구를 걷어차고 싶다’에서 발취 이 시는 따뜻하다. 이때의 잠은 세상에서 가장 질 좋은 잠이다. 잠이 찾아드는 밤은 모든 것이 평정을 찾은 밤이다. 멀리서 얼음장 쩡쩡 우는 소리 들려도 한 없이 포근한 잠이다. 자반고등어처럼 생의 맛이 부정이 깊어가는 밤이다. 가난하므로 정이 더 깊어가는 부자지간이다. 가난하므로 잠마저 공손하게 받아들이는 귀한 밤이다. 지하역에서 노숙자인 아버지와 그 품에 안겨 자는 모습은 눈물겹게 아름답다. ‘사람이 절창이다, 사람이 절경이다’라는 것을 한편의 이 시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정이 잘 갈무리 되라고 싸락눈이 염장을 지르는 겨울밤은 우리가 다시 이르고 싶은 겨울밤이다. 설피를 신고 언덕을 넘어서 이르고 싶은 풍경이다. 먼 산간지역의 눈 내리는 밤의 서정 같은 것이다. 이들은 이 잠을 수레바퀴 삼아 다시 삶으로 힘차게 복귀해 갈
어쩌다 침을 뱉다가 국화꽃에게 그만 미안하고 미안해서 닦아주고 한참을 쓰다듬다가 그만 그동안 죄 없이 내 침을 뒤집어 쓴 개똥, 말똥, 소똥에게 미안해서 그만 국화꽃에게서 닦아낸 침을 내 가슴에도 묻혀 보았더니 그만 국화 향기가 국화 향기가 그만 우리는 자신에게 불편한 것은 늘 내뱉는다. 국화에게 미안하다는 이 시편이 죄없이 내 침을 뒤집어 쓴 세상의 다른 존재들에게, 그리고 혼자 깨끗한 듯 퉤퉤 침을 뱉으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뱉은 침이라도 닦으며 살라고 다독인다. 내가 뱉은 침이 어느 들꽃들에게 묻었을 지라도 그 침을 닦는 순간 그 향기가 내게로 온다. 국화를 닦는 순간 국화향기가, 똥을 닦는 순간 똥내로 전이(轉移)되는 놀라운 정리(情理)를 노래주고 있다. 시인은 언제나 세상의 멘토다. 그러나 시인의 멘토는 언제나 자연! 자연은 아무에게도 침을 뱉지 않는다. 이 가을에 자연의 일부인 우리가 더러는 들꽃이 되고 새똥도 돼 사람과 자연, 자연과 나를 번갈아 보고만 살 수 있다면 좀 덜 미안할 지도 모르겠다. /김윤환 시인 - 안상학 시집 ‘아배 생각’/2008년/애지
물앵두를 보면 첫사랑 같다 가지에 주렁 주렁 열려 있는 것 보면 아직 사랑으로 건너가 보지 못한 노둣돌 같다 이때는 돌이 아니라 눈물 같은 그리움 사탕이 물컹 물컹 미끄러지다가 이슬 크기로 아지라이매달려 애간장 허공이거나 벼랑이거나 물앵두를 보면 눈이 멀 것 같다 첫사랑이 이름표 없이 오월 하루 지나가고 마는 속마음 소리없이 잦아드는 때 홀로 기갈 드는 때, “앵두는 이제 멸종되어가는 과일이에요, 아이들한테 이것이 앵두라고 보여주기만 하세요.” 멸종이라는 말에 별안간 울컥한다. 아저씨는 작은 키로 애써 가지를 잡아당기며 앵두를 따서 종이컵에 담아 건넨다. 정말 아저씨 말대로 아이들은 앵두를 모른다. 체리에 자두에 밀려도 한참이나 밀려버린 앵두, 흰 앵두꽃이 종알종알 매달리던 텃밭 가장자리, 알알이 붉은 열매들이 매달리면 국대접을 가지고 앵두 따러 갔다가 미끄러지기도 했는데, 앵두는 그렇게 유년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한없이 미끄러지는 첫사랑 같은 것? 제 손으로 처음 만져보고, 처음 따 보았던 과일, 그것은 키가 크지 않아서 꽃 피고 열매 맺는 과정을 다 볼 수 있었지만 아무리 떠올려도 맛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과육에 비해 씨가 크다는…
작년 여름에는 아기 주먹만 한 꽃 툭툭 불거져 집안을 채우던 향기 연초에 투가리 같은 아내를 먼저 보내고 하루하루를 치자나무에 걸어두는 노인 살뜰한 남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집요한 눈길 뿌리치지 못해 천길 달려와 해거리 하려다 그만두고 딱 한송이 한평생 무능력을 원망하며 돌아앉아 저 웬수 죽지도 않는다고 푸념하더니 마주보고 앉아 무슨 얘기 나누는 걸까 꽃도 노인도 오금저리는 오후 실체가 없어지면 상징에 연연하게 된다. 투가리 같은 아내와 살뜰치 못한 남편의 부부생활이 어땠을 런지 짐작이 간다. 투박하게 몇 마디 주고받고 밥 먹고 일하고 서로 실없이 상처도(저 웬수 죽지도...) 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생이 다 가도록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막상 아내가 덜컥 돌아가니 마음 둘 곳 없어 그 아내가 물주고 가꾸던 치자꽃 화분에 마음을 걸어두는 노인의 심정이 안타깝게 전해져 온다. 이심전심은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지 않는가 보다. 집요하게 바라보는 남편의 눈길 외면하지 못해 해거리 하려다가 돌아와 딱 한 송이 꽃 피워주는 아내 마음이라니, 글쓴이의 심성이 짐작이 가서 슬며시 웃음이 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지나간 후에 오금 저리도록 느끼는…
삼촌은 도축업자 사실 피 묻은 칼보다 무서운 건 삼촌이 막 잡은 짐승의 살점을 입에 넣어줄 때 입속에 혀를 하나 더 넣어준 느낌 입속에선 토막 난 혀들이 뒤섞인다 혀가 가득한 입으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고기에서 죽은 짐승의 체온이 전해질 때 나는 더운 비를 맞고 있는 것 같다 바지 입고 오줌을 싼 것 같다 차 속에 빠진 각설탕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녹아내린다 네 귀와 모서리를 잃는다 삼촌이 한 점을 더 넣어준다면 심해 화산의 용암처럼 흘러내려 나의 눈물은 금세 돌멩이가 될 것 같다 - 이현승 시집 ‘친애하는 사물들’/ 문학동네 잡은 짐승을 해체하는 장면은 TV에서도 많이 본다. 그 자리에서 도려낸 살점을 나눠먹는다.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들어왔을 때의 그 물컹함, ‘입 속에 혀 하나가 들어온 것 같은 죽은 짐승의 체온’이 몸으로 느껴진다. 시인은 ‘바지 입고 오줌을 싼 것 같다’고 말한다. 죽음으로서 인간에게 육식을 보시하는 짐승이지만 짐승도 따뜻한 체온이 있다는 것을, 표현할 수 없는 짐승의 슬픈 눈물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직업이므로 도축업자는 짐승의 목숨줄을 끊는 일을 하겠지만 끔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