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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 못 묻어줘 가슴 아파” 6.25 참전용사 김이선씨

팔공산 지뢰매설 위치 정확히 인계 작전수행 기여
실질적 보상 한달 7만원 국가유공자 혜택 못받아

 

1925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난 김이선(82)씨.

그는 6.25가 발발하며 남쪽으로 피난왔으나 전쟁에 참전하라는 나라의 명을 받고 1951년 1월 서울영등포로 훈련소에서 1주일간 훈련을 받고 전쟁에 투입됐다.

‘나라를 지키는 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되겠다’는 일념으로 육군에 입대한 김씨는 전후방을 오가며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경북 경산에 위치한 팔공산에 대대에 투입된 그는 밀려오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통로 역할을 했던 팔공산을 사수하기 위해 떨어지는 포탄을 피해가며 후방을 지키는 임무를 완수, 국군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는 밀려오는 중공군을 진입을 막고 전후방 부대 교대 땐 지뢰 매설 위치를 정확히 인계해 작전 수행에 기여한 공이 인정됐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훈장 수여자로 선정됐으나 전쟁중이라 휴전이 공포되기 10여일전인 53년 6월 25일 ‘한국전쟁 화랑무공훈장’ 수상하게 됐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제대 뒤인 55년 김춘자씨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2남1녀의 가장이 됐다.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부대를 나설 때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며 “내가 살아있는 것은 그 전우들의 덕으로 그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훈장을 받게 된 것도 함께 적군과 싸우다 자랑스럽게 전사한 전우들 덕분”이라고 “당시 전사한 전우들을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생각을 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6·25 참전용사로서 국가유공자 혜택을 받지 못하는 22만여명에게 주어지는 실질적인 보상은 매달 참전 명예수당 7만원뿐”이라면서 “외국의 참전용사 보상제도나 광주 민주화운동 유공자의 보훈수혜에 비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6.25참전용사 유해 발굴은 지난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육군 본부 내 1개과에 발굴단을 두고 활동했으나 작업 시작 당시에는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과연 유해를 온전히 발굴할 수 있을 지 의문시 됐었다.

그러나 미군 JPAC의 자문을 받으며 유해발굴을 했고 그 후 육본 유해 발굴단은 6년 간 모두 1천484구(국군 1182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이중 신원 확인이 완료된 전사자는 모두 52명이고 유가족까지 찾은 경우는 22명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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