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학협력이란 말 그대로 기업과 학교가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윈윈(Win-Win)해야 성공할 수 있다
김현기 수원대학교 산학협력단장은 성공적인 산학협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와 기업, 학교가 동등한 입장에서 사업 파트너십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학협력이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1990년대 초부터 정부와 기업, 학교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인 산학협력에 대해 주목했던 김현기 단장.
그는 교직에 서기 전 다년간 민간 기업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과 학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러한 김 단장의 노력은 지난 1997년 ‘제1회 산학연 전국대회’에서 수원대학교 산학협력단을 전국 최우수 1위로 이끌었다.
또 지난 2003년 ‘제4회 중소기업기술혁신대전’에서 김현기 단장은 산학연 전문가로서 그동안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는 근정포장상을 수상했다.
1993년 제1차 산학연 컨소시엄 사업부터 참가해 산학연경기지역협의회 회장과 (사)산학연전국협의회 회장직을 역임하는 등 우리나라 산학연의 역사를 함께 걸어온 김현기 단장. 우리나라 산학연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김현기 수원대학교 산학협력단장을 만나 그의 인생과 산학협력에 대한 신념을 들어봤다.
◇어려웠던 어린시절, 성공을 위해 나아가다
강원도 춘천이 고향인 김 단장은 초등학교 시절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김 단장은 “40년도 더 지났는데 그 날의 기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던 그 날 진눈깨비가 하얗게 내렸다”고 밝혔다.
군사정권 시절 한 대학교의 교수직을 맡고 계셨던 아버지는 핍박을 피해 어쩔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어린 기억이지만 어쩔수 없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만 했던 김 단장의 시린 마음을 하얀 진눈깨비는 더욱 시리게 했다.
김 단장은 “군사정권 당시 교수였던 아버지가 국가 보안법의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하셔야 했다”며 “몇 년에 걸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로 인해 가정은 파탄에 이르렀다”고 회상했다. 초등학교 시절,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에게 점심시간 도시락은 사치였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중학교 등록금을 마련해 학교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지만 이로 인해 그의 별명은 ‘거지’가 돼야만 했다. 김 단장은 “그 당시 먹을것 조차 없어 동네에서 주워온 우거지와 보리쌀로 쑨 죽을 먹고 일찍 잠을 잤다”며 “배고픔을 참기 위해서는 일찍 잠을 자는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어려웠던 시절, 김 단장은 이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공부만이 살 길이라 생각했다. 과외는 물론 그 흔한 참고서도 없었지만 김 단장은 열심히 공부해 연세대학교에 합격했고 아르바이트를 통해 학교를 졸업, (주)대한전선의 통신기술부에 입사했다.
◇민간기업에서 CEO의 꿈을 안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다
대기업에 성공적으로 입사한 김 단장은 통신기술부의 설계 엔지니어로 현장에서 근무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집중해서 하는 김 단장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곧 본사 회장 직속의 TF팀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래 부서에서 맡아 수행하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던 김 단장은 낮에는 본사의 TF팀 일을 하고 밤에는 원래 기술부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등 한달 동안을 쉬지도 않고 밤새 근무했다. 김 단장은 “위에서 시켜서 했다면 절대 못했을 것”이라며 “프로젝트는 결국 내가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자식과 마찬가지인데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인수인계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일에 대한 열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김단장의 이 열정은 민간기업을 나와 교직에 몸 담으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김 단장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며 “그 보람을 찾기 위해서는 신체의 어려움 정도는 이겨낼 수 있는 근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기업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잘 나갔던 김 단장은 회사생활 5년째 되는 해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된다. 김 단장은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 받고 나름 잘 나가고 있었지만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다”며 “나의 프로젝트가 아닌 회사가 원하는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 등 나 자신이 회사의 한 부품으로 인식돼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고 밝혔다.
김 단장은 이어 “직장 생활을 바탕으로 고급기술을 연마해 벤처 기업을 창업하고 싶었다”며 “나의 원래 꿈은 CEO였다”고 덧붙였다. CEO 꿈을 안고 돌아온 김 단장. 하지만 그의 미래는 또 다른 방향으로 이어져 있었다.
◇CEO를 꿈꾸는 교수, 산학연을 통해 꿈을 이루다
연세대학교 산업기술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중 삶을 위해 시간강사 일을 겸했던 김 단장. 우연한 기회에 그는 교수직을 제안받게 됐고 현재 수원대학교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로 임용됐다. 김 단장은 “나의 원래 꿈은 CEO였던만큼 이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며 “결국 CEO의 꿈을 현재의 산학협력단의 단장을 통해 실현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수원대학교 산학협력단은 수원대학교 내에 있지만 수원대학교와 또다른 법인으로 설립된만큼 또다른 하나의 사업체라고 볼 수 있다. 그 법인의 단장을 맡고 있으니 결국 기업의 CEO와 마찬가지라는 것이 김 단장의 설명이다.
김 단장은 “직장생활의 경력과 CEO의 꿈, 그리고 현재의 교직생활이 모두 집약된 결과가 산학협력단”이라며 “기업과 학교 모두의 입장을 반영해 함께 성공할 수 있는 산학협력단 운영이 나의 산학협력단 운영 이념”이라고 정의했다.
◇성공적인 산학연, 정부와 기업, 대학 간의 파트너십 필수
산학연 초기부터 산학연을 연구해 온 김현기 단장. 10년여의 세월을 산학연에 메달려 온 그에게 현재의 산학연 제도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지만 여전히 가야할 길이 멀기만 하다.
김 단장은 “산학연 제도를 통해 기업들은 학교의 우수한 연구인력과 연구자재, 공간 등 인·물적 인프라를 얻을 수 있고 학교는 학생들이 취업을 하기 전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며 “산학연의 활성화를 통해 기업과 학교가 함께 윈윈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산학연의 의미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많다는 것이 김 단장의 지적이다.
김 단장은 “산학연이란 정부와 기업, 학교가 함께 동등한 위치에서 파트너십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며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김 단장은 이어 “정부의 자금을 통해 학교가 기업을 지원하는 산학연 제도의 성공을 위해서는 정부가 학교와 파트너십을 통해 기업지원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기업도 학교를 단순 지원기관이 아닌 함께 사업을 이끌어가는 사업파트너로 인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산학연이란 정부와 학교가 기업을 위해 무한 봉사하는 것이 아닌 함께 잘되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제도라는 것이 김 단장이 설명하는 산학연의 정의이다.
김 단장은 “정부와 기업이 학교를 단순 봉사하는 집단으로 이해하면 안되듯이 학교도 정부와 기업의 입장에서 각 교수나 연구자들을 위한 연구가 아닌 기업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며 “서로의 입장을 감안한 파트너십이 설립됐을 때 성공적인 산학연 모델이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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