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빗장을 푸는 소리가 들린다. 몸속으로 스미는 바람엔 한기가 들어차고 바람이 지나칠 때마다 나무는 잎을 버린다. 노랗게 쏟아진 은행잎을 밟으며 삼삼오오 지나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도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묻어난다.
단축 수업 때문인지 한껏 멋을 낸 아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한 뼘은 짧아진 교복 치마에 화장기까지 살짝 있는 10대들, 빼빼로와 초콜릿이 진열된 상점 안이 북적이고 한산하던 거리가 활기를 찾는다.
그들의 모습을 유리문 밖으로 넘겨다보며 나의 10대를 생각해본다. 한 시간여 거리를 걸어서 통학했고 성적이 좋진 않았지만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방과 후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집까지 바라다 주시곤 했다.
자전거에서 떨어져 무릎을 다친 적도 있었지만 밤길이 위험하다며 자전거를 태워주셨다. 조그마한 것이 큰 가방에 눌려 키가 더 안 자라겠다며 걱정해주던 아버지 같은 선생님. 나는 그런 선생님이 좋아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선생님의 과목인 국어와 한문시간엔 미리 예습을 했고 누구보다도 성실히 질문에 대답해서 눈길을 끌었으며 국어와 한문 성적 또한 상위권이었다.
한없이 커 보이기만 하던 선생님.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모범 학생이 되어야 했고 선생님의 믿음만큼 내 성적도 좋아졌다. 고등학교 입학고사 보기 전날 선생님은 자장면을 사주셨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도록 자장면을 먹어본 적이 없다.
학교와 중국집은 벽이 거의 붙어있어서 자장면 볶는 냄새가 식감을 자극했고 건장한 사내가 면발을 두드리는 모습을 넘겨다보며 돈을 벌면 자장면을 실컷 먹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하곤 했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자장면을 막상 앞에 두고는 먹을 줄을 몰라 바라만 보고 있는 나에게 대나무 젓가락을 깊숙이 찔러 넣고 훌훌 섞어 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장면 먹고 힘내서 실수하지 말고 시험 잘 보라는 격려의 말씀이 얼마나 고맙고 힘이 되었는지 시험 보는 내내 정말 좋은 점수 받아서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마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자장면을 생각하면 선생님이 그리워진다. 얼마나 아름다운 제자 사랑인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선생님을 찾았다. 언제나 내 편이었고 버팀목이 되어주시던 분, 귀밑머리는 희끗하고 뿔테안경에 늘 같은 양복만 입어서 단벌신사라는 별명이 있던 호랑이 선생님이었지만 정이 깊고 따뜻하며 제자 사랑이 남다른 분이었다.
선생님 덕분에 학창시절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살면서 기쁠 때나 힘들 때 혹은 삶의 전환점이 될 때는 선생님을 떠올리게 된다. 중요한 결정 앞두고 쩔쩔매고 있으면,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 보지 말고 멀리 보는 혜안을 가지라며 충고해 주시던 선생님.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셔서 받은 사랑 갚을 수는 없지만 삶의 지침이 되는 스승을 가슴에 담고 사는 것이 큰 힘이 된다.
저렇게 발랄하고 거침없는 아이들의 가슴에도 큰 스승 한 분 있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 하는 생각을 떨어지는 낙엽 속에 던져본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안견문학상 대상 ▲시집-푸른 상처들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