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노벨(1833~1896)은 어느 날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자신이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죽음의 장사꾼, 숨지다(The merchant of death is dead)’라는 제목의 이 부고기사는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자신을,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대가로 부자가 된 ‘죽음의 장사꾼’으로 비하하고 있었다.
노벨은 자신의 지식을 축적해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다이너마이트가 아까운 생명들을 죽이는 살상무기가 된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자신의 전 재산을 노벨재단의 전신인 스웨덴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함으로써 노벨상이 탄생했다. 노벨상은 무엇보다 자신의 지식으로 세상에 유익을 끼친 ‘지혜로운 지식인’을 기리고 격려하는 상으로 지금까지 내려온다.
지혜는 지식과 다르다. 지혜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인 데 반해 지식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 또는 정보 그 자체이다. 그러니 지혜는 타인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피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지식인 셈이다.
아프리카에 ‘스프링폭스’라는 산양이 사는데, 이들은 아무 이유 없이 한꺼번에 몰려서 달리다가 벼랑 끝으로 떨어져 몰사하는 ‘알 수 없는 동물’로 더 유명했다. 동물학자들의 연구 결과 그 이유가 밝혀졌는데, 스프링폭스는 수백에서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살기 때문에 뒤쪽에 있는 양들은 앞쪽에 있는 양들이 풀을 다 먹어버리거나 밟고 지나가 버려서 늘 양식이 부족하여 어떻게든 앞으로 나서려는 본능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수천 마리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조급한 마음에 앞의 양을 밀게 되는데, 뒤에서 밀린 양들은 걸음이 빨라지다가 급기야 뛰기 시작하고, 그러면 뒤에 있는 양들은 앞의 양들이 뛰는 것을 보며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한가하게 풀이나 뜯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해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덩달아 뛰어간다. 그러다가 벼랑 끝에 다다르면 이때는 이유도 없는 경주를 멈추지 못하여 모두가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교육을 보고 있으면 마치 스프링폭스의 안타까운 경주를 보는 듯하여 답답해진다. 어려서부터 지식을 쌓느라 몰두하지만 왜 지식이 필요하며, 타인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지 성찰하지 않고, 그저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성공과 물질만능주의를 좇아 헛헛한 경주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분별하는 지혜가 없어서다. 분별력은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을 기초로 하여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으로, 올바른 생활과 건강한 시민정신, 도덕적인 행동을 위한 토대가 되는 덕목’이며, 옳고 그른 지식을 분별하는 능력이 지혜이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지식을 분별하여 기르는 힘이 바로 지혜의 성품에서 시작된다.
그동안 우리는 새로운 지식만 강조하는 ‘지식공화국’에 살았다. 많은 지식으로 좋은 스펙을 쌓고, 그 스펙이 다시 좋은 직장을 보장하는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며 달렸다. 그 결과 세계에서 우울증 환자가 가장 많은 나라, OECD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이 가장 높고, 행복지수가 꼴찌인 나라, 최근에는 황혼이혼율 1위, 패륜 범죄율 1위라는 오명을 쓴 나라를 만들었다.
지식에 사명이라는 본질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에 유익을 끼치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좋은 성품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사람을 지혜의 성품을 가진 지도자라고 말한다. 지혜는 어렵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성인(聖人)이나 갖추는 거창한 성품이 아니라 내 주변을 나의 지식으로 좀 더 행복하게 밝히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바로 지혜이다. 우리 주변에는 비록 적은 지식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소중한 지혜의 사람들이 많다. 그런 좋은 성품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지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