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봄이면 새싹이 돋고, 여름이면 초록의 잎사귀로 한껏 젊음을 불태우며,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두터운 나무껍질 속에 숨어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도 엄마 품에 안겨 멀뚱멀뚱 세상을 쳐다보다, 쉼없이 엎어지고 일어나길 반복하다가 달리면서 성인되고 또 늙어 가는 것이다. 그 안에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고 또 다시 가정을 이뤄 새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낸다.
비단 생명이 있는 유기체만이 이러한 시간의 규정을 받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숨쉬지 않는 딱딱한 돌덩이도 커다란 바위에서 작은 모래알로 그리고 흙으로 변하는 것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연(自然)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누가 뭐라 한다고 해서 억지로 제 몸을 뒤틀거나 잘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다른 무엇과 조화롭게 견뎌나가는 것이다. 만약 자연이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을 취한다면 그 순간 조화는 깨지고 무너진다. 조화가 깨지면 병들고 아파하다가 죽음이 드리운다. 그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하기에 자연은 늘 스스로 안정된 조화로움을 찾아 쉼 없이 변화한다. 어제 보았던 산을 오늘 다시 본다하여 그 산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 변화의 움직임이 시간인 것이다.
무예를 수련하고 내 몸에 풀어낼 때에도 궁극적인 목표는 자연스러움이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기에 억지로 거짓된 힘을 사용하거나 과도한 힘을 사용하면 조화로움을 깨지고 부서지고 만다. 그래서 무예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듣는 말이 ‘몸에 힘을 빼라’는 것이다. 특히 무기를 사용하는 무예의 경우는 어깨에 힘을 빼는데 보통 삼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말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힘과 몸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팔은 자연스럽게 몸통에 붙어 있다가 뭔가를 짚을 때 힘을 주어 움직이는 것이다. 무기를 사용할 때에도 평시에는 자연스럽게 있다가 상대의 움직임이나 자기 몸의 변화에 따라 힘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이다. 상대가 특별한 움직임이 없는데도 억지로 힘을 꽉 주고 칼이나 곤봉과 같은 무기를 들고 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몸의 조화는 깨지고 스스로 그 무기를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비단 무기를 쓰는 무예뿐만 아니라 맨몸으로 익히는 무예 또한 그러하다. 자연스럽게 어깨와 다리에 힘을 빼고 움직임을 만들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응축하여 발산하는 것이다. 만약 억지로 힘을 끌어다 쓰면 가장 먼저 관절에 무리가 오고 종국에는 뼈가 부서지고 마는 것이다. 무예를 배울 때 어깨의 힘을 빼는데 삼년이 걸린다고 하면, 마음의 힘을 빼는 데는 삼십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인체의 뼈가 완숙하게 익어가는 20대부터 본격적인 수련을 했다고 한다면 나이 50이 되어야 마음의 힘을 풀고 자연스러운 몸짓과 마음짓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논어(論語)에서 50살을 말하는 지천명(知天命)의 의미가 바로 마음의 힘을 빼고 자연스러움을 찾을 수 있는 나이라 풀이하곤 한다.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은 곧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는 일일 수도 있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면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우주 안에는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사람도 그 중의 하나를 차지하네[域中有四大, 而人居其一焉. (역중유사대, 이인거기일언)].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바로 도의 본 모습은 자연이며, 사람 또한 그 자연의 일부이기에 억지로 꾸미지 않으면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세상사 모든 일이 억지로 되는 일이 없다. 돈이나 권력으로 억지 행위를 한다면 언젠가는 조화가 깨지고 무너지고 만다. 오로지 자연스럽게 때를 기다리고, 몸의 양분을 축척해야 하는 것이 오늘 내가 해야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