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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한양도성과 수원화성

 

수도권에 있는 대표적인 성곽으로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수원화성과 남한산성이 있고 아직 등재되지 못한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있다. 남한산성과 북산산성은 서로 닮고 수원화성과 한양도성이 서로 비슷하다. 전자는 산성(山城)으로 평상시에는 비워놓고 유사시에 사용하는 것이고 후자는 평산성(平山城)으로 산성과 평지성의 이점을 결합하여 유사시에도 피난을 하지 않고 현지에서 싸울 수 있다.

한양도성은 1396년 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에 공사가 끝났으면 실제공사는 98일간 진행되었다. 물론 전체를 돌로 축성하지 않고 산지 1만2천척(약 3.6㎞)만 석성(石城)으로 하고 나머지 평지 4만3천척(약 12.9㎞)은 토성(土城)으로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본다. 물론 이후 세종시기에 토성을 석성으로 바꾸고 숭례문도 새로 축조하는 등 재건축을 하였고 숙종시기에도 큰 보수공사가 일어났다. 수원화성은 길이가 4천600보(약 5.6㎞)로 1794년 1월 시작하여 1796년 9월에 완성되고 실제공사는 2년 반이 소요되었다. 도성보다 작은데 기간이 더 걸린 것은 모두 석성이고 부대시설이 많았기 때문이다. 두 성곽의 준공시점이 공교롭게도 400년의 차이가 난다.

도성(都城)의 문은 동서남북의 4대문과 그 중간에 있는 4소문(小門)으로 총 8개가 있고 수문은 2개가 있었다. 대문 이름에는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5가지 도리 중 4가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음을 붙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북(北)은 숙청문(肅淸門·智), 동(東)은 흥인문(興仁門·仁·동대문)이라 하고, 남(南)은 숭례문(崇禮門·禮·남대문)이라 하고, 서(西)는 돈의문(敦義門·義·서대문)’이라 하였다. 4소문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동소문)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수구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서소문)이라 하고,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북소문)이라 하였다.

수문은 흥인문 남쪽에 청계천의 오간수문(五間水門)과 남산에서 내려오는 남소문동천의 2간수문(二間水門)이 있었다.

수원화성은 4개의 대문과 5개의 암문 및 2개의 수문을 가지고 있었다. 대문는 북문이 정문으로 장안문(長安門)미며 동문은 창룡문(蒼龍門), 남문은 팔달문(八達門)이고 서문은 화서문(華西門)이다. 암문(暗門)은 도성의 소문(小門)과 달리 육축과 건물은 없고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처리하고 있다. 위치는 동서남북에 북암문, 동암문, 서암문, 남암문의 4개와 남각루(화양루)로 통하는 남서암문까지 해서 총 5개가 된다. 수문(水門)으로는 북쪽의 화홍문이 7간수문(七間水門)이고 남수문은 9간수문(九間水門)이다. 북수문에만 화홍문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이곳이 특히 아름답기 때문이며 구한말 지폐의 그림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화홍의 뜻은 ‘화산으로 가는 물길에 있는 무지개다리’로 볼 수 있다.

도성과 수원화성의 준공시기가 400년 차이가 나는 만큼 성곽문화의 차이도 날 수밖에 없다. 앞서 만들어진 도성은 수원화성에 비해 부대시설이 거의 없다. 단, 흥인지문(동대문)에만 옹성이 있는데 이곳이 다른 곳보다 지대가 낮아 풍수적으로 보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었다. 하지만 풍수보다는 다른 이유에서 만들어졌다.

도성의 대문 주변에는 적대(敵臺)나 치성이 없는 이유는 대문을 성벽 안쪽으로 깊이 넣어 설치함으로 성벽이 적대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대문은 다른 곳과 달리 성벽이 대문보다 돌출된 부분이 남쪽은 없고 북쪽은 규모에 비해 아주 작게 나와 방어에 매우 불리하게 되어있다. 공사 후 설계의 잘못을 알고 준공 다음 해에 옹성을 추가 설치하게 되었다고 본다. 치성(雉城)은 처음에 없었지만 영조시기 어영대장이며 정조의 장인인 홍봉한의 건의로 설치되었다.

도성과 수원화성을 간단하게 서로 비교를 하였지만 각기 다른 시대상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우수한 문화재이다. 우리의 열정적인 관심은 그들이 영원히 살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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