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가 있는 저녁
/김민지
빗물이 마른 나무를 계속해서 찌른다
봄날의 저격수인가 꽃들의 수혈인가
세상이 폭탄 터지듯 온통 붉다, 온통 저리다
뼈 없는 마음으로, 가장 느린 걸음으로
속내를 감추고, 울음도 감추고
정처는 동가식서가숙 홀가분하겠네 쓸쓸하겠네
- 시조집 ‘타임머신’
이른 봄, 아직 나무가 눈을 뜨지 않았는데 봄비가 내린다. 죽은 나무에게 수혈하듯이 단비가 계속해서 내린다. 미동도 없던 나무에서 톡, 톡, 꽃눈이 떠지고 세상이 온통 환해진다. 온 몸이 저릿저릿 전기가 통하고 일제히 세상은 꽃의 터널 속으로 진입한다.그러나 한편에서는 세상 가장 느린 걸음으로 한 세상을 지나가는 목숨이 있다. 누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데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내일은 저곳에서 또 하루를 보내고,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으니 얼마나 홀가분할 것인가. 와옥(蝸屋) 한 채가 전부이니 더 무엇을 가진다 해도 짐만 될 뿐이다. 그러나 봄날은 짧고 환장할 봄날을 혼자 지나가는 일이란 또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아무 것도 욕심내지 않으니 성낼 일은 없지만 어찌 울음마저 없으리. 정처가 없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되지만 이슬 내리는 하룻밤은 어찌 외롭지 않겠는가./이기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