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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 문화칼럼]10월 26일의 의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날은 의미심장하다. 1909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테러리스트로서가 아닌 의병장으로서의 전쟁 수행이었다. 안 의사는 스스로 한국인임을 알리기 위해 “코리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힘차게 외치고 선선히 체포된다. 세계만방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자 의도했던 쾌거였다.

7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정보부장에 의해 총살 당했다. 한국의 현대사가 요동을 치던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렇게 10월 26일은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날이 되었다.

이토는 1841년생이며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대륙을 넘어서 아시아를 아우르는 대동아공영권을 꿈꾼 침략자였다. 그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으며 일제의 통치기관인 조선통감부의 초대통감으로서 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이다. 잃어버린 조국의 주권을 되찾고자 독립운동에 뛰어든 안중근으로서 이토는 용서할 수 없는 조국과 민족의 원흉이었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 출생이다. 그는 풍전등화 격이 되어버린 조국의 미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심하였다. 27세인 1905년에는 구국활동을 위해 상하이를 방문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하였고 부친상을 당하여 귀국하였다. 28세에는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여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고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구국영재 양성에 힘쓴다.

1907년 이후 일제의 수탈은 본격화된다. 외교권을 빼앗기고 군대마저 무장해제되자 안중근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구국의 의지로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의병활동에 나선다. 그리고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의 직함으로 항일투쟁을 결행한다.

안중근은 1909년1월, 러시아의 연추(煙秋, 현 크라스키노)에서 11인의 동지와 구국의 의지로 왼손의 넷째손가락을 단지하는 단지혈맹(斷指血盟)을 맺는다. 그때 이토가 만주시찰을 위해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이토 척살을 도모한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10시, 대륙 진출을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역에 도착한다. 환영행사가 시작되며 열차에서 내린 이토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된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의 민족혼을 보여준 손꼽히는 영웅이다. 따라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많은 콘텐츠가 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상하이로 간 한국인들에 의해 ‘애국혼’이라는 첫 전기영화가 만들어졌고 중국에서도 ‘잊지 못할 하얼빈’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광복 후 한국에서도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의사 안중근’이 만들어졌고 북한에서도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를 제작하였다.

나도 1990년 국군홍보관리소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을 만들었고 2010년, EBS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100년을 맞아 어린이 드라마 ‘대한국인 안중근’을 만들었다. 이처럼 안 의사는 우리의 민족혼을 상징하는 콘텐츠로 계속해 만들어졌다. 10월 26일 오전 10시, 서울 남산의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는 기념식이 열린다. 의사의 정신을 되새기며 계승하자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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