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산시 죽미령 평화공원
죽미령 평화공원은 한국전쟁 최초로 유엔 지상군이 파병하여 전투한 장소다.
오산시가 야심차게 준비한 죽미령 평화공원 사업은 6·25전쟁 당시 전쟁의 흔적과 냉전의 현실을 느끼고, 평화의 소중함과 통일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추진됐다.이에 죽미령 전투는 어떻게 진행됐고, 죽미령 평화공원 사업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추진됐는지 살펴봤다.
죽미령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북한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남침을 계속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 10여 일 만인 7월 5일 오산에서 복병을 만나게 된다. 예상에 없던 미군이 참전한 것이다. 이 사건이 바로 죽미령 전투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6월 30일 ‘지상군의 한반도 투입’을 건의했고, 곧바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큐슈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부대(미군 24사단 제21연대 1대대)가 한국전쟁에 투입된다.
540명으로 구성된 특수임무부대 스미스부대는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7월 5일 새벽 오산 죽미령 고개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날 북한군은 오전 8시 당시 최강이라고 불린 T-34전차를 앞세워 남침을 이어갔다.
이에 스미스부대는 105㎜ 곡사포, 75㎜ 무반동총, 2.36인치 로켓 등으로 대응했지만, 36대의 전차 중 단 4대만을 파괴했을 뿐이었다. 이어 오전 11시45분 전차를 앞세운 북한의 보병군과 백병전을 벌인 스미스부대는 모든 화기를 투입해 5천여 명의 보병과 맞섰고, 역부족임을 느껴 오후 2시30분 위포(은계동)로 철수했다. 그때 모인 부대원은 185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천안으로 이동해 병력을 재정비한 후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다양한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에는 비록 패했지만, 6·25전쟁의 전체적인 상황에서 볼 때 죽미령 전투가 갖는 의의는 중요하다.
북한은 개전 초기 유엔군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 하에 남침을 감행했는데, 죽미령 전투를 통해 유엔군의 참전을 확인한 후 재정비를 갖게 됐고,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10여 일 간 늦출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또 스미스 부대의 희생을 통해 유엔군이 북한군의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돼 유엔 회원국들이 적극적으로 무력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오산시는 죽미령 전투를 재조명하기 위해 유엔군초전기념관을 통해 당시 내용을 전시, 교육 및 추모하고 있으며,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인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평화공원과 스미스 평화관을 조성하여 희생에 대한 감사와 평화를 실천하는 장을 마련했다.

죽미령 평화공원을 조성한 계기는.
1950년 7월 5일 죽미령 전투에 참전했던 유엔군 소속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기 위해 1955년 스미스부대 참전 용사들이 한국을 방문해 죽미령에 구 초전기념비를 건립했고, 이후 매년 7월 5일 유엔군 초전기념비에서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다.
오산시에서는 유엔군의 첫 전투인 죽미령 전투를 다시 한 번 더 기억하고 상기하기 위해 참전용사 스미스부대, 한국전쟁사 등을 학예연구하면서, 생존한 참전용사들이 직접 겪었던 전투의 기억을 구술채록하고 사진 등의 기초자료를 모으는 사업을 추진중이다.
그리고 2013년에는 유엔군 초전기념관을 개관했다.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매년 3만5천명의 학생, 보훈가족, 주한미군 등 다양한 시민이 방문하는 수도권지역의 현충시설이자 전쟁·군사 박물관으로 국가수호와 평화교육의 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은 전쟁역사 체험교육과 자연 속 휴식공간의 기능을 결합한 ‘유엔초전 기념 평화공원’을 기획·조성하게 만든 산물이다.
기억을 전달하는 전시문화 공간에서부터 여가를 즐기며 역사체험을 통해 평화를 전달하는 평화문화 관광자원으로 거듭나 결국엔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죽미령 평화공원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면.
오산시는 경부철도와 1번국도가 지나가고 있으며, 경부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다.
여기에 교통로를 통해 병력을 이동하고 군사적 방어·공격이 이뤄지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오산시는 삼국시대부터 군사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죽미령도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죽미령 전투는 패배한 전투로만 보여지고 있지만 1945년 유엔 창설 이후 최초로 유엔기를 세워 파병한 지상군 전투로써 국제사회의 관심을 유도한 의미있는 전투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인지하고 있기에 한국전쟁 참전용사 출신인 찰스 랭글(Charles Bernard Rangel) 미 연방 하원의원은 2014년 미 의회에서 죽미령 평화공원 조성사업의 지지발언을 했으며, 2015년에는 미 연방 하원외교 위원장이 평화공원 조성사업을 지지하는 서한문을 대한민국 국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평화공원은 유엔초전기념관 뒤편의 임야를 활용해 2014년부터 조성돼 오다 지난해 약 13만4천㎡ 규모로 완공됐다. 이곳은 1950년 7월 5일, 그 치열했던 전쟁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회복하고자 하는 의미를 내포해 추모의 공간, 호국의 공간, 평화의 공간, 감사의 공간으로 조성됐다.
특히 이 평화공간은 1955년 건립된 구 유엔군 초전비를 사유지에서 평화공원 내로 이전해 많은 시민들이 추모할 수 있도록 했다.
또 540명의 스미스부대원의 이름을 각인한 워터커튼과 평화공원 상징물, 거울연못, 더글라스 C-54수송기 모형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한 감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조형물이다.
향후 운영계획은.
우리는 죽미령 전투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재구성과 전쟁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포함한 다양한 평화적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또 죽미령 전투가 국제연합이 참전한 전투임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국내의 문제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한계와 발을 맞춰 지속발전교육, 공동체, 환경, 평화, 인권, 빈곤 등 다양한 관점에서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글로벌 시각을 가진, 책임과 의식 있는 시민으로 성장해야 한다.
추도식과 기념식 역시 ‘시간 속 과거’, ‘평화 속 현재’ 그리고 ‘내일의 우리’라는 테마를 상징적으로 연출하고, 남북과의 화해와 협력, 유엔과의 한미 우호증진을 재조명하는 시간으로 추진된다.
평화공원에 대한 기대가 있는지.
우리나라 곳곳에는 대표라고 할 만한 큰 현충시설이 3개소가 있다.
서울에는 전쟁기념관이 있고, 천안에는 독립기념관, 부산에는 유엔평화기념관이 있어 훌륭한 안보 및 평화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죽미령 평화공원 또한 더 나아가 전 세계인들이 찾아오는 평화문화 전당의 명소가 되길 바란다.
평화공원은 인근의 독산성 세마대지, 아스달 드라마 세트장, 현재 건축 중인 복합안전체험관, 미니어처 테마파크, 잭슨파크와 더불어 경기 남부 관광벨트의 관광명소로써 찾아오는 시민들에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는 동시에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훌륭한 공간이 될 것이며,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교육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