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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3500명’의 아버지…600억 재산 바쳐 독립운동 후원한 이석영

[2020 광복절 기획 ①] 남양주 출신 독립운동가 영석 이석영
두 형제에 가려진 독립운동가 이석영 재조명 움직임
청산리대첩 산실 만든 신흥무관학교 교주…3500여 졸업생 배출
남양주시 “이석영 선생의 업적 널리 알릴 것”…광장 및 역사체험관 개관 예정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쳐 독립군 양성소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 설립에 결정적 기여를 한 항일운동가 영석(潁石) 이석영(李石榮 1855~1934)이 재조명받고 있다.

 

경기 남양주시는 이석영을 기리기 위한 ‘이석영 광장과 역사체험관’, ‘이석영 뉴미디어도서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독립기념관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이석영을 선정하고, 한 달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전시회를 연다.

 

◇ 600억 전 재산 독립운동 위해 사용…두 형제에 가려진 독립운동가

 

이석영은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둘째 형이다. 두 동생이 워낙 유명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 이석영을 포함한 여섯 형제는 일제의 노예로 살 수 없다며 전 재산을 처분하고 온 가솔과 함께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자금을 댔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이 쓴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에는 이석영이 아우들과 뜻을 합쳐 1만여 석의 재산과 가옥을 모두 방매했다고 기록돼 있다.

 

형제들이 마련한 돈이 당시 돈으로 40만 원이라고 한다. 쌀 1섬 가격이 3원 정도였다고 하니 지금으로 환산하면 600억 원이 넘는다.

 

일제가 모르게 급히 처리하느라 시세보다 헐한 값에 판 점을 감안하면 그 금액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진다.

 

◇ 청산리대첩 산실 만든 무장독립운동 큰 별…“이석영 없었다면 군관학교 설립 어려웠을 것”

 

이석영은 이조참판을 지낸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나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양자로 들어가 남양주에서 살게 됐다.

 

이유원은 소문난 거부(巨富)였다. 양주 가오곡(현 화도읍)에 위치한 이유원의 별장에서부터 80리 떨어진 서울까지 오갈 때 남의 땅을 밟지 않아도 된다(황현의 '매천야록')고 할 정도였다.

 

이석영 역시 1885년(고종 22) 증광시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 승지, 비서원승(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거쳐 종2품 장례원 소경까지 오른 인재였다.

 

하지만 그는 나라 안의 문제를 외세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세력들로 장악된 조정에 한탄하고 1904년 관직에서 사직하고 은거한다.

 

만주로 망명한 이석영은 자신의 재산을 독립운동단체 경학사와 군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쏟아 부었다.

 

 

<우당 이회영 약전>(1985)에는 "그(이석영)는 만주에서 살게 된 뒤에도 많은 지사들의 여비를 지급했고 신흥학교 창립 시에도 우당 선생이 바라는 바에 따라 학교의 설립과 유지 등 제 비용을 희사했다. 그가 만일 자금을 내놓지 않았다면 우당(이회영) 선생의 오랜 소원이었던 군관학교도 설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쓰여 있다.

 

특히 이석영은 신흥무관학교에서 이사장격인 교주(校主)를 맡아 학교 운영을 책임졌다. 그의 헌신 아래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개교 이래 1920년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학교 출신들이 당시 최강 화력을 지닌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 조국의 독립 못 보고 굶주림으로 별세…남양주시 “독립운동의 기초 다진 분, 널리 알릴 것”

 

하지만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듯 이석영 역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리며 따뜻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꼽히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과정과 운영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았으며, 3500여 독립군을 키워낸 아버지나 다름 없다.  

 

전 재산을 쏟아 부었기에 빈곤할 수밖에 없었던 이석영은 결국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중국에서 두부 비지로 연명하다가 1934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아쉽게도 이석영에 대한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이에 남양주시는 이석영을 더욱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홍유릉 앞에 ‘독립지사 이석영 광장’과 역사체험관 Remember1910을 개관할 예정이다. 지하 1층에 역사법정, 친일파 수감감옥, 이석영과 형제들 및 신흥무관학교 관련 전시공간을 조성한다. 

 

남양주시 조영덕 문화예술과장은 “이석영 선생은 독립운동의 기초를 다지신 분인데 (그간) 묻혀 있었다”면서 “남양주시가 시민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한테 이석영 선생의 업적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취지”라고 밝혔다.

 

[ 경기신문 = 노성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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