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7 (수)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이덕일의 역사를말하다]광개토대왕이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쳤다는 ‘일본서기’

 

네 나라가 공시에 조공을 바쳤다?

 

‘일본서기’는 한 마디로 평가하면 조공에 한이 맺힌 역사서다. 야마토왜가 조공을 받았다는 기사가 셀 수도 없이 많다. 이것은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백제의 제후국(담로)이었던 야마토왜를 황제국으로 변조하면서 중국 역사서들의 조공 기사에 착안해 조공 기사를 만들어 넣은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조공 기사에는 나가도 너무 나간 내용들이 많다. 그런 사례 중의 하나가 ‘일본서기’ 흠명(欽明)기 원년(540) 8월조에 “고구려·백제·신라·임나가 함께 사신을 보내 헌상하고 겸해서 조공을 바쳤다”는 구절이다. 고구려의 안원왕과 백제의 성왕, 신라 진흥왕이 나란히 야마토왜의 흠명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임나는 별개로 치더라도 이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가 아는 고구려·백제·신라라면 유치원 아이들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일본서기’ 서명(舒明) 10년(638)조에도 ‘백제·신라·임나가 함께 조공을 바쳤다’고 나온다. 638년은 562년 가야가 신라에 망한지 76년이 되는 해이다. 가야가 임나라면 망한 지 76년 되는 나라가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 극우파 사학자들과 이들과 한 몸인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이런 내용은 못 본체 눈 감으면서 줄기차가 ‘가야=임나’라고 주장한다. ‘일본서기’는 646년에는 “고구려·백제·임나·신라가 함께 사신을 보내 공물을 헌납하고 세금을 납부했다(貢獻調賦)”고 쓰고 있다. 세금을 납부했다는 ‘조부(調賦)’라는 표현은 이 네 나라가 야마토왜의 행정구역이라는 뜻이다. ‘일본서기’에는 이런 황당한 기사가 셀 수 없이 많다.

 

고구려·백제·신라왕이 항복했다?

 

‘일본서기’에는 심지어 고구려·백제·신라 임금이 야마토왜의 신공왕후에게 신하가 되겠다고 머리를 조아렸다는 기사도 있다. 신공왕후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정벌하자 신라왕이 지도와 호적을 뜻하는 도적(圖籍)을 바치면서 앞으로 매년 80척 분량의 세금과 공물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고구려·백제 임금도 항복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보자.

 

“이에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임금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圖籍)을 거두어 일본국(日本國)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히 명을 내려 그 군세를 살펴보니 곧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군영(軍營) 바깥에서 와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지금부터 앞으로는 영원히 서쪽 울타리로 칭하면서 조공을 끊기지 않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내관가(內官家)의 둔창(屯倉)을 정했는데, 이를 이른바 삼한(三韓)이라고 한다. 황후가 신라에서 돌아왔다(신공 9년조)“

 

신공 9년은 서기 209년이다. 일본 극우파들은 60년, 혹은 120년씩 끌어올리는 주갑제(周甲制)를 사용해서 120년 끌어올려 329년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329년에 신라는 흘해 이사금 20년이고, 고구려는 미천왕 30년이고, 백제는 비류왕 26년이다. 흘해왕·미천왕·비류왕이 모두 바다를 건너온 신공왕후에게 나라의 지도와 백성들의 호적을 바치면서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이다. 이를 ‘삼국사기’와 비교해보자.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 이사금 20년조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야마토왜의 신공왕후가 건너온 일 따위는 없었다는 뜻이다. 그 이듬해 벽골지(碧骨池)를 만들었는데, 둑의 길이가 1천8백보라고 말하고 있다. 고구려 미천왕 30년조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 미천왕은 그 9년 전인 재위 21년(320) 겨울에 군사를 보내 요동을 공격해 선비족 모용인(慕容仁)과 싸운 기사가 있다. 백제 비류왕 26년조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는 서기 329년 신라·고구려·백제왕이 왜의 신공왕후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삼국사기’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북방에서 고대 요동을 둘러싸고 선비족과 싸우던 고구려 왕이 경상도까지 와서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본 학자들도 신공 9년의 일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 발 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반전이 있다.

 

 

광개토대왕이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쳤다고?

 

신공 9년(329)의 일은 사실이 아니지만 신공 49년(369)에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운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도 이 기사를 사실로 받아들여 ‘가야본성’ 전시에서 ‘서기 369년 백제·왜 연합 가야 7국 공격’이라고 버젓이 써 놓았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이 나라 역사학계를 다시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위키백과’ 369년 조에도 “백제의 근초고왕과 야마토(倭)의 신공 여왕이 동맹하여 한반도 남부의 소국들과 싸워 이김”이라고 같은 내용을 써놓고 있다. ‘위키백과’도 일본 극우파들이 장악한 것이다. 같은 ‘일본서기’의 기사이고, 같은 신공왕후 기사인데 신공 9년의 기사는 사실이 아니지만 신공 49년의 기사는 사실이라는 헛된 주장들이 막강한 친일카르텔의 힘으로 사실처럼 통용되는 상황이다. ‘일본서기’에는 심지어 광개토대왕이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까지 있다. 응신(應神) 7년(276)조의 기록이다.

 

“7년 가을 9월 고구려인·백제인·임나인·신라인이 함께 조공을 바치러왔다. 이때 무내숙녜(武內宿禰)에게 명을 내려 여러 한인(韓人)들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게 했다. 이로 인해 이 연못의 이름을 한인지(韓人池)라고 불렀다.”

 

응신 7년은 276년인데, 120년을 더하면 396년이다. 396년에 고구려·백제·신라인들이 나란히 조공을 바치러 오자 이들에게 야마토왜에 있는 여러 한인들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게 했는데, 이 연못의 이름이 한인지(韓人池:한인연못)라는 것이다. 396년은 신라 내물 마립간 41년이고, 백제 아신왕 5년이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6년이다. 광개토대왕이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이 직접 작성한 ‘광개토대왕비문’은 대왕의 연호를 영락(永樂)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영락 6년(396)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왜적과 백제를 토벌했다(王躬率水軍討倭殘)”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은 광개토대왕이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왜적과 백제를 토벌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일본서기’는 왜에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사실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일본서기’의 눈으로 보자는 강단사학

 

그러나 일본 극우파들은 물론 남한 강단다학자들도 ‘일본서기’의 눈으로 한일고대사를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와세다대 출신의 인제대 교수 이영식은 이렇게 주장한다.

 

“현대적 국가 의식을 배제할 수 있는 방법은 오히려 ‘일본서기’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다. 객관적인 사료 비판을 통해 관련 기술을 다시 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우선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보는 태도도 필요하다.”(강만길 외 지음, ‘우리역사를 의심한다’, 서해문집, 2002, 46쪽)

 

역사학의 기초 중의 기초인 사료비판도 하지 말고 ‘일본서기’의 눈으로 한일고대사를 보자는 말이다. ‘일본서기’의 눈으로 한일고대사를 보면 고구려·백제·신라·가야는 모두 야마토왜의 식민지가 된다. 이영식의 “‘일본서기’로 다시 돌아가자”는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다시 돌아가자는 말은 원래 있던 곳으로 가자는 말이다. 야마토왜를 높이는 황국사관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