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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이민자들의 나라, 미나리의 나라

⑤ 미나리 - 정이삭

 

영화는 제목 하나로 비교적 모든 것을 추출할 수 있게 한다. 영화 ‘미나리’를 두고 사람들은 왜 ‘미나리’냐고 묻는다. 물론 미나리(를 심고 기르고 캐고 하는 등등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보다는 미나리가 상징하고 은유하는 내용의 영화일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영화에서 장모인 순자(윤여정)는 사위 제이콥(스티븐 연)과 별다른 상의 없이 손자 데이빗(앨런 S. 김)을 데리고 나가 미나리를 심는다. 집에서 좀 떨어진 냇가다. 순자는 데이빗에게 “여기가 미나리 심기에 딱 좋은 데네.”라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종자를 뿌린다. 미나리는 그렇게 뿌리기만 하면 스스로 알아서 크는 작물이다. 요즘에야 미나리가 숙취 해소에 꽤나 좋은 것쯤으로 다 알고 있지만 옛날 사람들에겐 잔병에 안 걸리게 하고, 무조건 여기저기 건강에 좋고, 그래서 오래오래 살 수 있게 해주는, 만병통치의 나물로 인식돼 왔다. 향은 강하고 독특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약과 같은 나물로 취급받았다. 무엇보다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나물이라는 점이 좋았을 것이다.

 

할머니 순자는 그렇게, 미국 땅 아칸소에 미나리 씨를 뿌리면서 손자 데이빗이 미나리처럼 쑥쑥 아프지 않게 자라기를 바라는 소망을 보여 준다. 데이빗은 심장이 아주 약하며 그래서 엄마 모니카(한예리)나, 아빠 제이콥이나, 거의 입버릇처럼 아이에게 이런 얘기를 하게 만든다. “데이빗. 뛰지 마.” 영화 초반부터 모니카는 아들 데이빗에게 강한 톤으로 그렇게 얘기하는데 전후 사정을 모를 때는 그게 꽤나 의아하게 느껴진다. 엄마가 아들에게 지나치게 딱딱하게 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로 이 부부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아이, 특히 아들을 엄하게 키우려고 한다. 아픈 아이니까 더 세심하게, 반면에 그렇게 특별히 정을 더 주는 만큼 더욱 엄격하게 군다.

 

영화 ‘미나리’도 그렇게 양가적(兩價的)이고 이중가치적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는 어쩌면 우리들(특히 아버지 세대들)이 살아가는 내내 겪어야 했던 척박한 인생을 그려 내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그 안에 담겨 있는 가족주의와 따뜻한 인간관계를 펼쳐 내려 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을 더 비중 있게 보느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시선은 많이 달라진다. 일상은 늘 폭력적이지만 그 폭력 속에도 인본(人本)적인 무엇이 삶을 견디게 하는 법이다. 일상의 폭력성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철없는 짓이다. 그렇다고 그 안에서 휴머니즘의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삶의 동력을 잃게 되는 일이다. 두 가지에 대한 인식은 전체와 부분, 안의 것과 밖의 것을 연결하는 고리다.

 

 

영화를 보다 보면 비교적 명확하게 영화 전체가 감독인 정이삭(미국명 리 아이삭 정)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채워져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정이삭은 코리안 아메리칸 3세대로서 자신의 전 세대가 어떤 일을 하고, 또 겪으며 살아 왔는 가를 전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전전(前前) 세대인 할머니가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민자로서의 고립된 삶 속에서 자신에게 무엇을 남기고 갔는 가, 어떤 정체성을 부여하고 갔는 가를 기억하고 기록하려고 한다.

 

그 과정이 매우 눈물겹지만 정이삭 영화의 특징은 그걸 ‘눈물의 카타르시스’로 과장되게 분출시키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는 가능한 꾹꾹 누른다.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의 애증도 선을 넘지 않게 한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도 지나치게 (한국적으로) 유별나게 보이지 않게 하려 한다. 여기 나오는 가족들, 특히 아버지와 엄마는 가혹한 운명을 대할 때에도 어마어마하게 분노하지 않고(각고의 노력으로 재배한 채소들이 불타 없어지지만), 비정상적으로 광적이지도 않으며(모니카가 살짝 미신에 가깝게 기독교를 믿지만) 목을 놓아라 통곡하지도 않는다.(장모이자 할머니인 순자가 죽은 것인지 살아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게 그려진다.) 이상한 관계가 생겼을 법 한데 그걸 드러내려 하지도 않는다.(병아리 감별 전문가인 제이콥은 아내 모니카 옆에서 일하는 공장의 여자와 자꾸 눈이 마주친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그 톤앤매너가 좋다. ‘미국식으로’ 개인주의적이거나 냉정하지도 않으면서 ‘한국식으로’ 다분히 요란을 떨지도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이 이야기가 가공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인공적이지 않고 매우 내추럴한 느낌을 준다.

 

‘미나리’가 거대담론을 보여주려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2007년작 ‘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와 서사 구조와 그 맥락이 유사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앤더슨의 영화는 주인공 대니얼(다니엘 데이 루이스)이 캘리포니아의 한 작은 마을 리틀 보스턴에서 홀로 유전을 캐며 지옥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의 어린 아들은 정신적으로 ‘약간’ 아픈 아이인 데다 친자식도 아니지만 그는 아이를 나름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미나리’에서도 제이콥은 아칸소의 ‘깡촌’에서 한국 채소 농장을 만들겠다면서 그야 말로 ‘열일’을 한다. 그는 미국에 한국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에 결국 신선한 한국 음식 재료를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의 작물은 댈러스와 덴버를 넘어 캘리포니아까지 팔리는 기회를 맞기도 한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낸다. 우물도 직접 판다. 아내는 그의 ‘야망’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 믿지 않는다. 제이콥 입장에서 보면 대니얼처럼 실로 고난의 행군이 아닐 수 없다.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는 대니얼의 주변에 광신도 목사가 한 명 나타나는데 폴 선데이(폴 다노)가 그다. 둘은 결국 비극적 파국을 맞는다. ‘미나리’의 제이콥 주변에도 광신도가 한 명 기웃대며 살아간다. 폴(윌 패튼)이란 이름의 남자가 바로 그다. ‘데어 윌 비 블러드’와는 달리 ‘미나리’에서 둘은 폭력적 관계가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왠지 불편하다. 폴은 제이콥의 일꾼이다. 폴은 정말 성심을 다해 일을 하는데 입에 주님을 달고 사는 게 문제다. 그는 수도승처럼 자신을 학대하며 비루한 삶을 살아간다. 제이콥은 폴이 아내인 모니카에게 종교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싫지만 그가 없으면 자신의 노동이 배가 될 것이라는 점을 안다. 그는 억지로 폴의 신앙 방식을 인정한다. 어쨌든 두 영화가 닮았다는 착시와 오해가 생기는 건 그 같은 인물 배치와 관계 설정 때문일 것이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100년 전의 이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강고한 노동과 프로테스탄트적 금욕주의, 오일(oil)과 그를 둘러싼 (정치사회적이면서도) 폭력적인 관계로 이루어진 나라인 가를 보여 주려 한다. ‘미나리’도 19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의 레이건 시대 때의 얘기며 미국이 얼마나 혹독하고 자기희생적인 노동의 이민자들 손에 의해 길러진 나라인 가를 웅변한다. 두 영화 모두 미국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 흔히들 얘기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하는 것의 진면목을 보여 주려 한다. 자본주의란, 인간의 손과 몸으로 땀 흘려 재화를 만들어 내되 청교도적 가치로 스스로는 검약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회인 것인 바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은행과 지수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금융자본주의 이후부터) 인간 노동이 갖는 본연의 숭고함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몰아내고, 차별하려 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인데 미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민자들이 구축해냈던 자본의 올바른 물신성(物神性)을 몰각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간난(艱難)했던 삶을 이겨냈던 한 가족의 이야기로 풀어 가면 올바른 자본주의적 정신이니 미국적 가치니 하는 말들은 말을 위한 말, 수사학(修辭學)에 불과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제이콥이 모니카에게 강조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모니카는 더 이상의 힘든 노동의 삶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녀는 자신만이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캘리포니아로 가고 싶어 한다. 제이콥은 모니카에게 말한다. “나는 여기 있을 거야. 그래서 나중에라도 아이들이 아빠가 이루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어.” ‘미나리’는 우회적으로, 그리고 은근히, 지금은 상실된 부성의 가치를 회복시키려고 한다. 순자의 미나리 밭을 이어받는 것도 결국은 제이콥이다. 제이콥=아버지는 결국 많은 일을 해낸다. 상대적으로 엄마 모니카와 딸 앤(노엘 조)의 역할은 뒤로 숨겨져 있다.

 

스티븐 연을 완전히 새롭게 보게 됐다. 그는 더 이상 이창동의 ‘버닝’에 나오는 이국적인 인물이 아니다. 광신도 폴 역의 윌 패튼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정이삭 감독은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인 데이빗의 캐릭터에도 공을 들인다. 그 연출의 배분과 조합, 흐름이 뛰어나다. 퍼펙트하다. 좋은 영화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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