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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곶감 빼먹기

 

찬바람 휘휘 돌아칠 때마다 살짝 얼었다 다시 녹아내리기를 반복하며 단내 폴폴 만들어내다 보면 기어이 하얀 분을 뒤집어쓰고 먹음직스럽게 제 모양 뽐내곤 하는 곶감이 있다. 처마 밑에 정갈하게 매달린 채 이제 막 하얀 분 뒤집어쓰기 시작하는 곶감. 밤늦게 학교숙제 하다말고 마루건너 잠 쫓으러 나갔다가 한 알 빼먹고, 마당에서 문득 올려다 본 그 달빛에 취해 또 하나 빼먹고, 아무도 없는 집이 심심해서 또 하나 빼먹다가 기어이 두 알 남은 곶감걸이를 보고

“오늘은 내 기어이 이 곶감귀신을 잡아야겠지?”

라며 찡긋 윙크를 날리시던 아버지가 생각나게 하는 그 곶감.

 

곶감이 가지런히 담겨져 있다. 설날 선물이라며 전해온 박스 안에 마치, 추억처럼 한 알 한 알 말갛게 웃는 있는 그 곶감들의 미소로 인하여 환하게 피어오르는 지난 이야기들. 한입 베어 물면 입안이 텁텁해지도록 떫고 불편한 맛의 땡감나무만 있었던 어린 날의 우리 집. 간식이 따로 없었던 그 시절, 왜 우리 집엔 단감나무가 없냐고 불만을 털어놓을 때마다 특단의 조치로 엄마는 삭힌 감을 만들어주셨다. 떫은 땡감을 따서 소금물로 하루정도 삭히고 나면 아삭아삭한 식감을 자랑하는 그 어떤 단감보다도 맛있는 삭힌 감이 되었다. 그 삭힌 감은 가을 소풍에도 등장하고 가을 운동회 날에도 등장하는 특별 간식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 집 몇 그루 감나무 중 딱 한 그루 있던 대봉감나무에서 열린 제법 굵직굵직한 감으로는 삭힌 감을 만들지 않고 충분히 익은 후에 따서 단단한 녀석은 곶감으로 말리고 말랑말랑한 녀석은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 홍시로 만들었다. 겨우내 항아리에서 단내를 숙성시키는 대봉의 홍시. 공부 하다말고 슬슬 잠이 올라치면 살짝 얼어있는 대봉 홍시 한 숟가락 푹 떠서 입안으로 넣으면 가슴 속까지 서늘하게 씻어 내리는 그 시절 최고의 아이스크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봉이 곶감 되기를 기다리는 일은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 제법 껍질이 쭈글쭈글하니 곶감인 듯 보여 한 개 슬쩍 빼먹으면 아직도 한참은 떫은 맛. 그래서 한 며칠 더 기다리다 이제는 된듯하여 또 하나 빼먹으면 아직도 떫고 입속에 텁텁함이 남는 지난번 그 맛. 그리고도 한 며칠 더 지나 또 하나 빼먹으면 제법 단내가 들긴 했지만 끝 맛이 떫은 듯 기분이 텁텁한 맛. 결국 늦가을부터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신 아버지께서는 감을 깎아 한 줄씩 매다시고 나는 들락날락 하나씩 빼먹었으니 곶감귀신으로 낙인찍히기에 충분한 듯 보인다.

 

그렇게 수년을 곶감 깎기 많이도 힘드셨는지 아버지께서는 마침내 단감나무 과수원을 만드셨다. 가을마다 지천으로 열린 감, 원 없이 먹어라 소원하시더니 그 감나무 다 감당 못하시고 먼 길 떠나셨으니 이제는 내게 단감을 따줄 이도 곶감을 깎아주실 이도 없다. 선물로 받은 달디단 곶감 베어 물다 말고 결혼 후 처음으로 우리 집에 오셨던 그 겨울, 열 개씩 정갈하게 묶은 직접 말린 곶감을 건네시며 아버지 하시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 곶감은 말이야, 봄부터 가을까지 햇살에 제 살 내맡기고 버텨낸 땡감만이 될 수 있는 거야. 찬찬히 보거레이 세상에 그저 되는 거는 하나도 없다니까. 이 곶감처럼 제 살 깎아 또 한 번 찬바람에 나설 용기가 있어야 거듭나는 인생을 사는 거야.”

지금도 나는 그 말씀 빼먹으며 산다. 힘들고 서러운 날 마주칠 때마다, 앞이 캄캄하여 길을 헤맬 때마다 곶감꽂이에서 곶감 빼먹듯 아버지 그 때 그 말씀 연거푸 빼먹으며 힘을 얻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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