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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봄 강물 살찌는 소리 들으며

 

 

내 인생의 또 다른 아침이다. 산으로 가던 발길을 강으로 돌렸다. 기찻길 건너 테니스장을 지나니 00중학교다. 손녀딸이 다니는 학교다. 이 학교는 오래전부터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를 하면 꿈을 이룬다.’는 글귀를 교문 위에 걸어 놓고 있다. 중학생이 된 손녀는 속이 야무지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겠다고 작정한 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어젯밤에는 그 녀석 생일이라고 가족과 함께 식사했다. 나는 작은 용돈과 함께 정성 들여 황금빛 색지에 축하의 덕담을 적어 봉투에 넣어 주었다. 손녀딸은 집에 가서 보겠다며 엄마의 가방에 넣어두라고 한다. ‘녀석은 용돈 액수가 궁금할 뿐 내가 쓴 문장과 그 의미는 뒷전일 것이다. 하지만 ‘책 읽고 글 쓰시던 할아버지로 기억할 수도 있겠지-’ 싶기도 했다.

 

학교를 지나 어느 교회를 뒤로하고 높직한 강 언덕에 올랐다. 청양 한 공기가 숨길을 새롭게 하였다. 산과 하늘과 태양 빛이 달라 보였다. 자연스럽게 곡선을 이룬 길과 강의 흐름이 조화로웠다. 큼직큼직한 디딤돌을 재미있게 딛고 강의 중심에 이르렀다. 며칠 전 비가 내렸다고 강물은 넉넉한 품세로 흘러가고 있었다. 대표에세이 동인들과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라는 수필집을 발간했을 때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흐른다는 것은 움직씨로써 재생과 부활의 의미를 지닌다. 꽃이 피고 지고 잎이 솟아 벌고 새 가지가 형성되는 계절의 순환과도 갔다. 그리하여 봄은 희망과 부활의 계절이 된다.

 

강의 중심 디딤돌에 서서 한동안 무심하게 서 있었다. 눈 거두어 발아래를 본다. 디딤돌 틈새에는 비료포대가 나뭇가지와 엉켜 흐르는 물살이 사나워졌다. 허리 낮추고 팔 벌려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어냈다. 그리고 언덕 아래 멀리 가서 버렸다. 다시 가서 그 자리에서 물소리를 들으니 달라졌다. 물길이 제대로 열린 것이다. 내 마음속에도 새로운 강줄기가 열리는 것 같았다. 겨울 동안 가물었던 강과 메말랐던 강바닥은 불어난 강수량만큼 넉넉해졌다. 강의 살찌는 소리를 듣는 내 마음에도 봄의 물길이 트이는 것 같았다.

 

강의 섬 같은 곳에서 머지않은 곳엔 긴 의자가 있었다. 나는 그 의자에 앉아 모자도 마스크도 장갑도 벗고 편히 앉아 강으로 눈길을 주었다. 강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혈관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몸 안 세포에 수분이 분무 되어 생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은혜로운 순간이다. 생명을 위한 새로운 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해서라도 팔 벌리고 마음껏 달려보고 싶었다. 한참 동안 고요히 앉아 있으니 오리 떼가 끼리끼리 헤엄치며 아침 시간 목청을 돋운다. 그 순간 고향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밥 먹어라!’ 하고 부르시던 어머니의 목청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외로워졌다. 그러나 이런 외로움과 혼자만의 시간이 있었기에 ‘외로움 속 겸손한 인격의 탑’을 생각하며 살아올 수 있었지 싶었다.

 

곱디고운 그리움에 젖어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귀갓길의 디딤돌을 디디며 다시 한 번 봄 강물 살찌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 봄에 우리나라에서도 흥부네 집 박탈 때 같이 신명 나는 일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 싶은 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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