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인천 섬을 가다 25-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1)

신석기시대부터 유인도이자 역사적인 명승지

 인천 연안부두에서 보통 4~5시간 걸리는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 글쓴이가 이 섬을 처음 방문한 건 1997년 10월이다. 당시 교육자료를 만들기 위해 3박4일 일정으로 왔었고, 귀가 당일 북한이 포사격 연습을 한다는 이유로 발이 묶였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연구를 위해 지난해까지 몇 차례 방문이 이어졌고, 마침내 올해부터 백령중고에 근무하게 되면서 도서민으로서 백령도를 마주하게 됐다. 언젠가 섬역에서 그곳 주민과 희노애락을 함께하며 학생을 교육하고, 섬연구를 하리라 생각했던 그 바람이 이뤄진 것이다.

 

지금까지 띄엄띄엄 며칠 간의 섬 조사는 현장의 확인 차원에 불과했지만 이제 긴 호흡을 하며 이모저모를 살펴보며, 백령도를 소개하려고 한다.

 

아! 백령도, ‘흰 백(白)’과 ‘깃 령(翎)’이 더해진 이름. 이름에서 보이는 흰 빛깔과 새(조류)의 깃으로 조합된 지명인데, 이런 작명은 흔치 않은 일이다. 흔히 주변 지형이나 대표적 랜드마크와 연관된 지명을 만들지만 ‘백령’은 뭔가 순수하고 많은 전설을 간직한 듯 신비감이 든다.

 

▶ 체크 Point 1. 섬 이름의 유래

 

황해도 어느 고을 사또의 딸과 선비가 사랑을 나눴고 장래를 약속했다. 이를 안 사또는 자신의 딸을 백령도로 보냈고, 장래를 같이 하기로 한 선비는 예비 아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누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는가” 어느날 선비는 하얀 학이 흰 종이를 물어다주고 가는 꿈을 꾸어 놀라 깨어보니 정말 종이에 주소가 적혀 있었다. 선비는 주소를 들고 장산곶에서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와서 사또의 딸을 찾아 회포를 풀며 단란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이 섬을 백학이 알려주었다 하여 일명 ‘백학도(白鶴島)’라 했고, 이후 ‘백령도(白翎島)’라 불리고 있다. 해피 엔딩의 길조와 십장생으로서 장수의 상징, 천연기념물 제202호인 두루밋과의 백학은 지역의 순수성과 신성성을 암시해 주는 듯하다.

 

▶ 체크 Point 2. 백령도는 언제 이뤄졌을까?

 

백령도가 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언제일까? 원래 해수면 아래의 육지는 옹진반도(장산곶)와 연결된 같은 뿌리의 육도(陸島)였다. 바다가 육지(land-bridge)였던 빙하시대(일명 구석기시대)에는 걸어서 왕래가 가능했으나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인 후빙기(Post-glacial, 신석기시대 이후부터 현재에 이름)부터 오늘날과 비슷한 따뜻한 기후가 도래하면서 빙하가 녹고 저지대부터 물이 차오르면서 바다가 형성돼 오늘날의 섬이 이뤄졌다.

 

약 6000년 전에는 현재와 같은 해수면이 형성됐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으며, 다양한 해양 지질 탐사와 연대 측정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 체크 Point 3. ‘백령도’ 섬에서 초기 인류의 흔적은 무엇이 있을까?

 

진촌리(말등) 동북쪽 하늬 해안가의 낮은 구릉 메밀밭에서 백령도 최초의 인류 흔적인 조개더미(패총)가 찾아졌다. 조개더미는 사람이 먹고 버린 패각이 쌓여 있는 곳으로 서해안에서 많이 발견되며 당시 사람들이 쓰던 생활도구나 뼈, 심지어 인골, 주거지까지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진촌리 유적이 찾아진 계기는 옆으로 해안도로가 나면서 경작지 단면에 패각이 드러나 알려지게 됐다.

이 유적은 1981년 일부 지점을 발굴해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갈돌, 갈판, 돌도끼, 파쇄용 석기, 다수의 동물뼈 그리고 원형의 화덕자리가 확인됐다. 패각층의 두께는 단면에 노출된 두께보다 두꺼운 1~1.5m이며, 거의 굴껍데기이고 약간의 고둥류가 확인됐다.

 

빗살무늬토기는 계란형으로서 무늬는 그릇 전면에 넣은 것이 아니라 입술 부분 및 그 언저리 일부에 넣었는데, 서해안에서 유행한 유물들이다.

 

석기는 패각층에서 원시 맷돌 1세트와 갈돌 3점, 뗀(타제)돌도끼 9점, 파쇄용 석기 1점이다. 곡식의 껍질을 벗기거나 갈 때 사용하는 대표적 농경 도구로 알려진 갈돌과 갈판이 한 세트로 출토된다는 것은 이례적이며 추가로 갈돌 3점이 찾아졌다는 것은 당시 ‘원시 농경’ 활동이 있었다는 간접적 증거로, 파쇄용 석기도 곡식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게다가 돌도끼도 나무를 베거나 땅을 일구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 농경 혹은 해산물 가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석기 재료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규암제 둥근 자갈돌을 이용했다.

 

뼈유물은 패각층에서 멧돼지 이빨을 비롯해 다량의 동물뼈가 출토됐는데, 가공해 만든 도구류는 없고 모두 식량으로 섭취 후 버린 뼈들로 보인다. 그렇다면, 화덕자리는 당연히 획득한 식량자원을 익혀 먹기 위해 불을 피웠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을 종합해 보면 진촌리 유적에서 신석기인들은 사냥, 어로, 원시 농경을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장산곶에서 월내도(月乃島, 달내섬)를 거쳐 이곳에 도래했을 것이다. 전면 발굴이 안 돼 아쉽지만 통일 후 더 광역화된 조사를 기대해 본다.

 

이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 3200±250B.P의 연대값을 얻어 신석기 후기에 해당한다.

 

이 유적은 황해도를 비롯한 주변에서 발굴되는 고고학적 해석의 가늠자 역할 및 선사 유적의 중요성이 인정돼 옹진군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됐다. 더 훼손되기 전에 감람암 포획 현무암 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와 하늬바다의 점박이물범(천연기념물 제331호)과 함께하는 문화권을 설정하고, 세계지질공원을 지향하는 백령도의 위상과 궤를 같이해 시너지 효과를 거둬야 할 것이다.

아득히 먼 신생대 제4기 옹진반도에서 멀어진 백령도, 누가 이 섬을 ‘절해고도(絶海孤島)’에 비유했을까? 그러나 3000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인간의 삶이 시작된 유인도였고, 어느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었을 정도의 명소였다. 그 최초의 정착지는 우)23101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진촌1리 하늬 해안가였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