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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에서] 호의를 받아들일 용기

20년 전에는 우산 없이 등교해서 비가 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비 사이로 뛰어가는 축지법을 쓰면 좋겠지만 그럴 능력은 없어서 그냥 맞고 갔다. 어둑어둑한 학교 정문에 학부모들이 우산을 들고 서 있다가 자신의 아이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아이들 틈에서 많던 사람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나처럼 우산도 데리러 올 부모님도 없는 아이들만 남아 있게 되면 급하게 뛰어서 집으로 갔다.

요즘은 이런 풍경을 찾아보기 어렵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우산을 대여해주는 사업을 벌이는 곳도 있고, 교실에 남아 있는 우산들이 4~5개씩은 있어서 담임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우산을 빌려준다. 없으면 옆 반에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아이 손에 우산을 들려서 보낸다. 그러니 아이가 비 맞는 걸 강력하게 원하지 않는 이상 혼자 추적추적 비를 맞으면서 집에 갈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봄비가 내렸던 며칠 전 일이다. 퇴근하려고 나가는 데 정문 앞에서 3~4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머리를 신발 주머니로 가린 채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우산이 없어서 집에 못가나 싶었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태권도 차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학원 차가 도착하려면 10분도 더 남아 있었다. 빗속에 아이를 그대로 두면 안될 것 같아서 다시 말을 걸었다.

"친구, 혹시 우산이 없나요? 교실에 가면 담임 선생님이 빌려주실 거예요. 아니면 선생님이 가져다 줄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헐레벌떡 교실로 돌아와 우산을 챙겨 내려가 보니 아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우산을 펼쳐서 건네자 아이가 거절했다. 태권도가 끝나고 집에 갈 때도 비를 맞아야 할 테니 우산을 쓰고 가라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우산을 내일 돌려줘도 되고 아니면 돌려주지 않아도 좋다는 말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혹시 모르는 사람이라 거절하나 싶었다. 한껏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선생님인데 나를 본적이 없냐고 물었다. 아이는 세차게 도리질하며 "본적이 없어요, 아니요."만 반복해서 답했다. 우산이 쓰기 싫으면 학교에 비를 피할만한 처마에서 기다리다가 차가 보이면 나오는 걸 제안했지만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코로나 때문에 다들 감기에 예민한데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싶었다. 몇 번 더 실랑이하다가 아이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서 옆에 우산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를 맞겠다고 서 있는 아이를 탓할 수가 없다. 학교에서 낯선 사람이 호의를 베풀면 받지 말라고 교육하기 때문이다. 성별이 어떻든, 나이가 어떻든, 친밀하지 않은 사람이 친절하게 대하는 걸 받아들이지 말라고 가르친다. 아동의 연령이 어릴수록 상대방을 잘 믿기 때문에 꼭 의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내용이 교육에 들어간다.

유괴나 아동학대 예방법을 설명할 때 모르는 사람이 도움을 준다고 하거나, 혹은 반대로 도움을 달라는 사례가 나오면 답이 정해져 있다. 최대한 빠르게 자리를 피하고, 그 사람이 계속 말을 걸며 따라오면 부모님이나 경찰서에 전화한다. 전화하는 게 여의치 않을 땐 근처 가게에 들어가서 도움을 요청한다. 수업 마지막 즈음에 어린 아동에게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접근해서 범죄를 저지른 실제 사건을 보여주면 아이들의 표정이 단박에 굳는다.

아이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모르는 사람이 건네는 호의를 거절했을 뿐이다. 단지 그뿐인데 세차게 도리질하던 아이의 얼굴이 떠나질 않는다. 세상에는 진심으로 아이에게 도움을 주려는 어른들이 대부분이지만 소수의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아이의 입장에선 어떤 사람이 착한 어른이고 나쁜 어른인지 구별하는 것보다 모두를 나쁜 어른으로 판단하는 게 안전할 확률이 높다. 비 오는 날 건네지는 우산을 받는 데도 용기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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